상산사호(商山四皓) 설화에 바탕을 둔 신선의 춤.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주요 공연 종목 중 하나로, 『조선일보』 1938년 1월 7일자 기사에 처음 소개된 신선들의 춤이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주요 레퍼토리로 1938년 처음 소개된 이후, 1940년 2월 27일 도동기념공연에 일본에서 신무용을 배운 권오봉(權五蜂)과 한성준이 이인무로 추었다고 한다. 특히 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1940년의 기록에 의하면, 1940년 7월 8~9일 일본 동경의 히비야공회당(日比谷公會堂)에서 조선음악무용대회(朝鮮音樂舞踊大會)를 개최하여 대성황을 이루고, 연이어 동경을 비롯 대판ㆍ경도ㆍ명고옥 등 일본 대도시 순회공연 등에서 신선무가 추어졌다. 광복 후 정인방 등에 의해 신선무가 무대에 올려지며, 한성준의 전통춤이 근대무용의 선구자로부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통춤의 공연 종목으로 역할을 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1938년도 활동부터 일간지에는 ‘고전무용’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한성준의 작품은 한국 근대 춤 사에서 아직 ‘전통’에 대한 언급이 이뤄지지 않았고, 신무용 또는 권번의 예기 춤과 다른 양식의 민족적 정서를 지닌 춤으로써 ‘고전무용’이었다. 일제강점기 흩어졌던 우리의 문화 자원을 집대성하여, 전통적 방법론으로 재해석, 창작한 한성준의 다양한 공연 레퍼토리는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어지는 새로운 전통의 재창출로서 의미가 깊다고 여겨진다.
신선무는 그런 의미에서 설화를 통해 전통적 방법으로 재해석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공연 레퍼토리라는 면에서 매우 의미가 있으며, 광복 후까지 신무용의 주요한 작품 중 하나로 이어졌다.
김영희,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활동에 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논문집』 32, 2002. 김영희, 「고전무용 용어의 등장과 전개」, 『한국무용연구』 39/4, 2021. 성기숙,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설립배경과 공연활동 연구」, 『한국무용연구』 32/3, 2014. 이정노, 「한성준의 조선춤 작품에 나타난 탈지역성과 탈맥락화 양상 연구 –1938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작품을 중심으로」,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37/1, 2018. 윤중강, 「[윤중강의 현장과 현상 사이]서울경기춤포럼과 한성준춤 바로알기」, 『서울문화투데이』, 2023.11.29.(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901) 한성준, 「고수 오십년」, 『조광』, 조선일보사, 1937. 4. 「묵은朝鮮(조선)의 새香氣(향기) ⑥ 歌舞篇(가무편)B 國唱朴氏(국창박씨)와意氣投合(의기투합) 斯道(사도)에精進大成(정진대성)!」, 『조선일보』, 1938. 01. 07.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10700239102001&officeId=00023) 『조선일보』, 1938. 09. 17.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publishDate=1938-09-17&officeId=00023&pageNo=1&printNo=6235&publishType=00020) 「오늘밤! "춤"의舞臺(무대)는열린다」, 『조선일보』, 1940. 02. 27.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publishDate=1940-02-27&officeId=00023&pageNo=1#) 「舞踊藝術人綜合(무용예술인종합) 作品鑑賞會盛况(작품감상회성황)」, 『조선일보』, 1956. 02. 13.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publishDate=1956-02-13&officeId=00023&pageNo=1)
박선욱(朴羨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