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 공연 종목 중 하나로, 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에서 내려오는 벽사의식무(辟邪儀式舞)적 〈상좌춤〉을 토대로 어린 상좌 중이 재주를 표현한 작품이다.
한성준이 상좌무 설명으로 일간지에 밝힌 민간 전래의 춤은, 산대놀이와 해서 탈춤에서 전승되어 온 〈상좌춤〉으로 파악된다. 가면극을 시작하는 첫 과장으로 벽사의 의식무를 통해 판을 정화하는 〈상좌춤〉 과장이 있는데, 이 때 춤 중심의 〈상좌춤〉이 추어졌다. 〈상좌춤〉으로 벽사의 의식무를 시작하는 가면극은 서울ㆍ경기의 산대놀이 가면극과 황해도 탈춤이 있다. 《송파산대놀이》ㆍ《양주별산대놀이》ㆍ《퇴계원산대놀이》ㆍ《봉산탈춤》 등에서는 〈상좌춤〉, 《강령탈춤》ㆍ《은율탈춤》 등에서는 〈사자춤〉이 〈상좌춤〉 과장에서 연행되고 있다. 《강령탈춤》 제1과장 〈사자춤〉에는 사자ㆍ마부ㆍ원숭이가 나와 춤을 추고, 제4과장에 〈상좌춤〉이 등장한다. 특히 《은율탈춤》의 경우 제1과장 〈사자춤〉, 제2과장 〈헛목춤〉이 모두 벽사의식무인 〈상좌춤〉 과장에 해당되는데, 다른 가면극의 ‘상좌’를 《은율탈춤》에서는 ‘헛목’이라고 부른다. 〈헛목춤〉은 〈사자춤〉과 동일하게 놀이판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으며, 염불ㆍ늦타령ㆍ자진타령장단 순으로 춤을 추고 퇴장한다. 지금은 헛목(상좌)도 가면을 쓰지만, 원래 헛목은 가면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상좌춤〉을 묘사한 주목할 사료로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이 지은 한시 『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1789)가 있는데, 1778년 남대문 밖에서 연희된 본산대놀이를 보고 지은 것이라 한다. ‘평파갱전석(平陂更展席, 평평한 언덕에 새로 자리를 펼쳐) 승추무치소(僧雛舞緇素, 상좌 아이 깨끼춤 추는데)’라는 구절이 〈상좌춤〉을 묘사한 부분이다. 산대놀이의 기원과 계통을 밝히는데 매우 소중한 사료를 통해, 〈상좌춤〉에 등장하는 어린 상좌승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린 상좌중의 춤은 《퇴계원산대놀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상좌춤〉 과장에서 8~9세 정도의 어린 상좌중과 15~16세가량의 상좌중이 나와 춤을 춘다.
대부분 하얀색의 탈과 고깔, 흰 장삼을 입고 빨간색의 가사를 어깨에 두르는데, 《은율탈춤》의 복식은 세 개의 꽃이 달린 흰 고깔을 쓰고 가사를 양쪽 어깨에 두르는 특징이 있다. 춤꾼의 수도 《은율탈춤》은 1인, 《강령탈춤》은 2인, 《봉산탈춤》은 4인의 상좌가 추고 있다. 각 지역의 〈상좌춤〉은 의상과 춤꾼의 수, 장단과 춤사위 등에서 차이가 있으나, 동서남북 사방에 배례(拜禮)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쳐 판을 정화하는 공통된 의미의 춤을 추고 있다.
〈상좌춤〉에 대한 이러한 사료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성준의 상좌무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간지에 게재된 7~8세의 천진스런 아이들의 재주를 설명한 한성준의 소개가, 단순히 재주 있는 아이들의 춤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 전래된 전통의 계승과 고증을 염두에 둔 작품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일보』 1938년 4월 23일자 「전조선향토연예대회(全朝鮮鄕土演芸大会)」 기사에 게재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공연 연목 중 상좌무의 소개를 보면 “민간에서 전해오는 춤에서는 가장 종교적 색채가 잇는춤이다. 발과 팔의 놀림이 시로 기묘하다. 그런데 이 상좌무를 마터추는 세 소녀는 금년 일곱 살 여덜 살 난 어린아기들이다. 비록 나히는 어리지만 그 재조가 놀라워서 귀여웁고 영리하고 탐스러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 번 네번 찬타네할 것이다. 벌써부터 이 세 소녀의 인기는 비상하야 조선무용을 뒤이어갈 큰 짐을 넉넉히 마터가터라고 하야 무용연구회의 모든 귀여움과 촉망을 한몸에 밧고 있다.”라고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두 달 뒤, 조광회 주최 부민관에서 개최된 1938년 6월 19일자 『조선일보』의 「고전무용대회(古典舞踊大會)」 기사에도 상좌무가 소개되었는데, ‘모다 일곱 살 난 천진스러운 아가씨들이 나삼(羅衫)을 길게입고 송낙(송라(松蘿)을 기피쓰고 법고를 치며’ 추는 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출연자는 조효금(趙孝金)ㆍ김재분(金再粉)ㆍ한입분(韓立粉)으로 1938년 4월 23일자에 실린 사진에 의하면 어린 세 명의 소녀가 탈을 쓰지 않고 설명과 같이 고깔과 장삼에 가사를 두르고 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1938년도 활동부터 일간지에는 ‘고전무용’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한성준의 작품은 한국 근대 춤 사에서 아직 ‘전통’에 대한 언급이 이뤄지지 않았고, 신무용 또는 권번의 예기 춤과 다른 양식의 민족적 정서를 지닌 춤으로서 ‘고전무용’이었다. 일제강점기 흩어졌던 우리의 문화 자원을 집대성하여, 전통적 방법론으로 재해석ㆍ창작한 한성준의 다양한 공연 레퍼토리는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어지는 새로운 전통의 재창출로서 의미가 깊다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상좌무는 가면극과 《해서탈춤》에 나오는 〈상좌춤〉을 토대로 전통의 고증과 계승을 통해 전통적 재해석을 가한 창작 작품이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전경욱, 『한국의 가면극』, 열화당, 2007. 김영희,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활동에 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논문집』 32, 2002. 김영희, 「고전무용 용어의 등장과 전개」, 『한국무용연구』 39/4, 2021. 성기숙,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설립배경과 공연활동 연구」, 『한국무용연구』 32/3, 2014. 이정노, 「한성준의 조선춤 작품에 나타난 탈지역성과 탈맥락화 양상 연구 –1938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작품을 중심으로」,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37/1, 2018. 윤중강, 「무척 잘했음에도 매우 안타까웠던 이유: 서울춤연구시리즈 1. 묵은 조선의 새 향기」, 『댄스포스트코리아』, 2024.09. (https://dancepostkorea.com/new/board/review/pfm_view.php?b_idx=594) 한성준, 「고수 오십년」, 『조광』, 조선일보사, 1937. 4. 「古典舞踊大会(고전무용대회) 朝鮮特産品展覽會紀念(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全朝鮮鄉土演芸大会總觀(전조선향토연운대회총관)」, 『조선일보』, 1938. 4. 23.(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42300239104001&officeId=00023) 「眩恍(현황)ㆍ燦爛(찬란)한無我境(무아경) 古典舞踊大會(고전무용대회) 遂再現(수재현)」, 『조선일보』, 1938. 6. 19.(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61900239104002&officeId=00023)
박선욱(朴羨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