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조선 정악의 재건을 위해 결성된 단체
1946년 운영이 단절되었던 조선정악전습소가 조선 정악의 재건을 위해 조선정악회를 결성했다. 한편 1920~30년대에 정악 연주가 포함되는 연주회를 조선정악회라고 지칭하거나 연주회에서 정악을 연주하는 음악인들을 조선정악회라고 표기한 경우가 있다.
1920년대 서울 및 각 지역에서 조선정악회라는 명칭의 연주회가 종종 개최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1926년 8월 개최되는 연주회에서 정악을 연주한 단체로 인천조선정악회가 출연했다. 즉 정악을 연주하는 연주회 또는 연주단체에 대한 명칭으로 조선정악회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이 이어지며 1946년 정악의 발전을 도모하는 단체로서 조선정악회가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 역사 변천 과정
1946년 12월 11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해방 전후로 운영이 중단되었던 조선정악전습소는 서울 수송동에서 조선정악회를 결성했다.
1944년 페쇄된 조선정악전습소의 후신으로 1946년 12월에 김영재, 김인수, 김태영 등이 '정악회'라는 가칭으로 조직을 결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1946년 결성 이후 조선정악회라는 단체명으로는 확인되는 활동이 없으며 1947년 문교부 인가를 받아서 (사)한국정악원으로 재출범하게 된다.
○ 설립 목적 및 설립 주체
조선정악회는 조선 정악 재건이라는 목표를 위해 조선정악전습소의 유지, 발전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정악회 설립의 주체로 조선정악전습소가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해방 전 조선정악전습소의 운영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조선정악회 결성에 조선정악전습소 관련 인물이 주체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고문으로 김용진(金容鎭), 함화진(咸和鎭),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이혜구(李惠求, 1909~2010), 장인식(張寅湜, 1908~1980) 등과 같이 음악인 또는 음악학자가 참여했다. 이사장으로 최영재(崔永載), 부이사장으로 홍덕유(洪德裕), 김영희(金榮喜) 등이 확인되는데 그 중에 최영재는 1920년대 조선정악전습소의 유지회 구성원이기도 했다. 이들 외에 23명이 당시 조선정악회 구성원이었다고 확인된다.
조선정악회는 20세기 전반기 영산회상, 가곡, 시조 등과 같은 이른바 정악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음악의 발전과 보급을 위한 단체로서 음악인, 음악학자, 그리고 각계 유지들이 뜻을 함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는 당시 판소리, 민요, 잡가 등과 같은 성악곡이 유행하던 상황에서 정악 역시 공연 및 음반 녹음 등에 포함될 수 있게 하는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장사훈, 『여명의 동서음악』, 보진재, 1974. 박은경, 「한국 최초의 민간음악교육기관 조선정악전습소 연구」, 『음악과 현실』 21, 민족음악학회, 2001.
임혜정(林慧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