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법육조(指法肉調)
특정 악기의 음색을 관례화된 음운으로 모방하여 음고나 연주법 등을 지시하는 것
구음이란 각 악기 별 음색을 특정 음운으로 모방하여 음고나 연주법 그리고 표현법 등을 관례적인 규칙에 따라 기호화한 것이다. 구음은 청각적으로 구연(口演)되기도 하고 육보(肉譜)처럼 시각적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육보로 기보될 때 경우 구음의 분절음만을 기보하며, 또 기악의 연주 범위를 넘어서는 구연 자의 개성적인 음악 표현은 나타내지 않는다.
구음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세종실록(세종 12년 2월 19일)에 보이는 “지법육조(指法肉調)”이다. 예를 들면 박연은 “신이 상세히 그 소리(聲)를 율명으로 고쳤고, 그 지법육조도 하나의 궁(宮)에 소속된 오음(五音)으로 밝혀놓음으로써 서로 문란하지 않게 하였습니다"라고 함으로써 현행의 구음에 해당하는 음악 기호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세조실록악보 서문에 “전대(前代)에는 성음절주(聲音節奏)와 소삭완급(疏數緩急)을 기보한 악보가 없었고 단지 그 소리(聲)를 본 딴 육보(肉譜)를 만들어 음악을 전했을 뿐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늦어도 15세기에 육보는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구음이 육보, 즉 문자 기록으로 전환되지는 못했다. 15세기 이후로 구음을 기록한 고악보로는 거문고, 비파, 적(笛), 가야금, 양금 등의 육보가 있는데, 이 중에서 거문고 육보가 가장 많고 여타 악기의 육보는 매우 적이다. 더 나아사 현재 전승되는 기악 음악에 비해 해당 육보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적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대부분의 기악 음악은 육보 보다는 구음 구연으로 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이후로 대중적인 공공 교육에서 악보가 요구되었는데, 이에 따라 그간 만들어지지 못했던 여러 악기의 악보가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그러면서 구음 구연은 악보로 대체됨으로써 구음은 점차로 쇠퇴하게 되었다. 현재 극소수의 기악 명인들이 기악 교수 및 음악적 소통에 구음을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당대 몇몇 명인들(정재국, 이세환, 최충웅, 김영재, 지순자, 최경만, 허용업)이 가야금, 거문고, 피리, 해금, 대금, 태평소 등의 구음 구연으로 수제천, 영산회상, 산조․ 대풍류, 민요 등을 녹음해 놓았다.
구음은 구연되거나 육보로 기록된다. 구연 시에는 한국어의 분절음과 비분절음을 모두 사용해서 음악적 의미를 지시하지만, 육보에는 분절음의 일부만이 기록된다. 따라서 육보에서는 구음 실연에서 구현되는 연주자의 개성적인 음악 해석이나 표현법은 기호화되지 않는다. 악기 별로 구음에 사용되는 음성 기호가 서로 다르고, 또 시기 별로 구음 기호를 운용하는 방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다음 몇 가지 점은 특정 시기나 악기를 넘어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구음 구연 시에 등장하는 분절음의 자음은 특정 악기의 음색과 지법, 탄법 등과 같은 연주법, 그리고 모음은 상대적 음고를 나타내고, 또 비분절음은 엑센트나 농현 등과 관련되어 있다.
악기의 음색을 모방한 음악기호를 학습과 전승 그리고 음악적 소통에 사용한 사례는 한국 음악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음악, 인도 음악 등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구음을 체계적인 기보 논리로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창조적인 음악 해석을 구체화하는 도구로 활용한 한국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구음 구연은 구연자의 성악적 자질에 따라 특정 악기의 음악을 기호로 나타내는 것을 넘어서 독립된 가창물로서 한국 기악 음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일부 성악가들은 구음을 모방한 성악곡인 “구음시나위”를 노래하기도 한다. “구음시나위”에서는 구음 구연에 등장하는 음운을 모방하지만 이것을 일정한 원칙은 없이 사용한다. 따라서 “구음시나위”는 특정 악기에 대한 기보 기능이 전혀 없으므로 구음과 다르다.
『세조실록악보』 『금합자보』 (『한국음악학자료총서』 22권) 권도희, 『들리는 기보법-구음』, 민속원, 2011. Kwon, Do Hee, Oral to Aural Signs and the Meaning of the Singing Mnemonics in Korean Traditional Music, 『한국음악학의 지평』, 민속원, 2014. 이상규, 『국악기 구음법』, 민속원, 2015. 김우진, 『거문고 육보체계에 관한 통시적 고찰』, 민속원, 2015. <구음 口音, 하나 둘>(2CD, Z-KRIGACD-001),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2009. <구음 口音, 셋 넷>(2CD, Z-KRIGACD-002),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 2010.
권도희(權度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