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연정재창사초록(國讌呈才唱詞抄錄) 전(全)
조선 고종(高宗)때 예조판서와 장악원(掌樂院) 제조(提調)를 역임한 바 있는 석촌(石邨)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광무 5년(1901)에 편찬한 궁중 정재 창사에 관한 책
『국연정재창사초록』은 조선 고종 때 나라의 큰 잔치였던 진연(進宴)이나 진찬(進饌) 등에서 연행되었던 궁중무용인 정재(呈才)의 창사를 모아 오류를 바로잡고, 연향의 성격에 맞도록 그 내용을 정리·초록한 책
『국연정재창사초록』을 짓게 된 연유는 편자 윤용구의 발문에 의하여 알 수 있다. 나라 잔치에 쓰이는 정재(呈才)의 사장(詞章)은 『악학궤범』 및 『등록』 등에서 볼 수 있으나, 잘못 기록되거나 문리(文理)가 이어지지 않는 곳이 많다. 또한 각 전궁(殿宮)에서 사용되는 것이 하나의 노랫말을 그대로 섞어 쓰니, 참으로 미안한 노릇이다. 심지어는 무동(舞童)과 여령(女伶)조차 분별이 없다. 계사년(1893)의 양로연(養老宴)과 진연(進宴), 그리고 갑오년(1894)의 회연(會宴) 때에 당상(堂上)으로 명을 받들어, 간략히 교정(較正)하였다. 그러나 속(俗)되고 비루(鄙陋)한 것은 응당 깎아버려야겠으나, 또한 감히 모두 고칠 수는 없었으니, 진실로 이 때문에 부끄럽다. 주상(主上) 보위(寶位) 31년 갑오년(1894), 3월 하한(下澣) 이원제거(梨園提擧) 윤용구(尹用求) 씀.1
편자의 발문에 의하여 이 책의 대부분이 완성된 것은 1894년 3월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문 뒤에 ‘신제(新製)’ <수연장>과 <제수창>의 창사가 실려 있는바, 이들 창사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1901년 5월의 진찬과 7월의 진연에서 불려진 창사의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따라서 표지에 기록된 광무(光武) 5년 신축(辛丑, 1901) 7월에 최종 완성되었다.
1) 國讌呈才詞章, 見於樂學軌範及謄錄者, 多有誤書, 與文理不屬處. 且各殿宮一辭混用, 殊涉未安. 至於舞童女伶, 亦無分別. 癸巳養老宴進宴, 甲午會宴, 以堂上承命, 略有較正. 然其俚陋當刪者, 亦不敢惟意盡改, 良用慚歎之也. 上之三十一年 甲午, 三月, 下澣, 梨園提擧 尹用求 識.
○ 체재 및 규격
필사본 1책으로 원본의 소장처를 알 수 없으며, 책의 정확한 규격도 알 수 없다. 다만 1941년에 이주환(李珠煥, 1909~1972)이 필사한 사본의 복사본만 알려져 있다.
이흥구 소장 복사본의 표지 제명은 『국연정재창사초록 전』이며, 표지 우측에 ‘광무 5년 신축 7월 일’로 적혀 있어, 이 책의 편찬 시기가 1901년 7월임을 알 수 있다. 표지 안쪽에는 ‘이주환 근정(李珠煥 謹呈)’, 뒷 표지에는 ‘소화 신사 세 6월 17일 사지(昭和 辛巳歲 六月 十七日 寫之)’라 하여 1941년 6월 17일에 이주환이 이를 필사하여 누군가에게 증정한 것으로 보인다.
○ 소장처
소장처가 국립국악원으로 알려진 바 있으나, 현재 국립국악원에는 소장되어 있지 않다. 다만 1941년 이주환이 필사한 사본의 복사본이 남아서 학계에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바, 복사본으로는 이흥구(李興九, 국가무형유산 학연화대합설무 보유자)가 김보남(金寶男, 1912∼1964)으로부터 전해 받았다고 하는 자료와 김천흥(1909~2007)의 제자인 박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 소장한 자료 등이 알려져 있으나 모두 동일한 사본의 복사본이다.
○ 편찬연대 및 편저자 사항
『국연정재창사초록』의 주된 내용은 고종 때 예조판서와 장악원 제조를 지낸 바 있는 윤용구가 1893년 양로연과 진연 그리고 1894년 회연(會宴) 등 당시의 국가 연향에서 연행된 정재 창사에 잘못 된 글자가 많고, 연향의 상황과 격에 맞지 않는 표현 등이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1894년 3월에 집필하였고, 향후 일부 내용을 보완하여 1901년 7월에 완성하였다.
편찬자 윤용구는 순조 때 많은 정재 악장을 지은 바 있는 효명세자의 막내 동생인 덕온공주(德溫公主)의 양아들로 거문고 악보인 『현금오음통론』(1886)의 편찬자이고, 족형 윤현구와 더불어 『칠현금보』·『휘금가곡보』(1893) 등을 남긴 바 있으며, 한시와 서예·그림 등 예술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 구성 및 내용
『국연정재창사초록』의 주된 내용은 제1면부터 수록된 ‘각정재창사(各呈才唱詞)’부분인데, 수록 내용은 <봉래의(鳳來儀)>, <몽금척(夢金尺)>, <경풍도(慶豐圖)>, <헌선도(獻仙桃)>, <헌천화(獻天花)>, <만수무(萬壽舞)>, <침향춘(沈香春)>, <제수창(帝壽昌)>, <수연장(壽延長)>, <무고(舞鼓)>, <보상무(寶相舞)>,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포구락(抛毬樂)>,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사선무(四仙舞)>, <첩승무(疊勝舞)>, <향령무(響鈴舞)>, <최화무(催花舞)>, <최화무(催花舞)>(죽간자 없음), <연화대무(蓮花臺舞)>, <연화무(蓮花舞)>, <오양선(五羊仙)>, <육화대(六花隊)>, <무애무(無㝵舞)>, <선유락(船遊樂)>, <춘앵전(春鸎囀)>, <무산향(舞山香)>, <박접무(撲蝶舞)>, <아박무(牙拍舞)>, <향발(響鈸)>, <망선문(望仙門)>, <춘대옥촉(春臺玉燭)>, <영지무(影池舞)>, <춘광호(春光好)>, <고구려무(高句麗舞)>, <검기무(劍器舞)>, <항장무(項莊舞)>, <학무(鶴舞)>, <광수무(廣袖舞)>, <초무(初舞)>, <첨수무(尖袖舞)>, <공막무(公莫舞)>, <사자무(獅子舞)>, 발문(跋文), 신제 <수연장창사>, <제수창> 등이다. <검기무>부터 <사자무>까지는 창사가 없다.
『국연정재창사초록』 15a(제29면)에 고종 31년(1894) 3월에 쓴 이원(梨園, * 장악원의 별칭) 제거(提擧) 윤용구의 발문이 실려 있어 이곳까지가 1894년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발문 뒤에 이어진 신제(新製) <수연장> 창사와 <제수창> 창사는 그 이후에 보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수연장> 창사는 1901년(신축) 5월의 『진찬의궤』에 실린 창사와 같으며, <제수창> 창사는 1901년(신축) 7월 『진연의궤』의 창사와 일치한다.
편저자인 윤용구는 고종 때 예조판서와 장악원 제조·교방사 제조 등을 역임하며 궁중 연향애 깊이 관여하였고, 스스로 거문고 악보인 『현금오음통론』과 칠현금악보인 『칠현금보』·『휘금가곡보』 등을 편찬하는 등 음악과 무용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윤용구는 순조 때 다수의 정재 악장을 지은바 있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막내 동생인 덕온공주(德溫公主)의 양아들이다. 윤용구는 외숙 효명세자가 생전에 심혈을 기울였던 정재 악장과 창사에 관심을 가지고, 당시에 와전되던 창사를 상황에 맞도록 바로잡고자 이 책을 편찬하였으므로, 『국연정재창사초록』은 조선 후기 정재사 연구에 소중한 문헌자료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국연정재창사초록』
성무경, 「『국연정재창사초록』을 통해 본 고종조 연향악장 정비」, 『대동문화연구 49』, 2005. 이정희, 「윤용구 편찬 음악 자료의 소장 현황 및 의의」, 『동양음악 44』, 서울대학교, 2018.
김영운(金英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