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방(風流房)
율(音律), 즉 풍류를 연주하고 감상하는 공간
풍류를 즐기는 풍류객들이 모여서 악기를 연주하고, 감상하는 공간으로 풍류방(風流房)이라고도 한다.
풍류를 즐기는 공간으로서 율방(풍류방)의 의미는 조선 후기에 풍류를 즐기는 향유층이 확대되면서 비전문 음악인들이 모여서 악기를 연주하고 감상하는 풍류모임의 성격을 띠었다.
○ 역사 변천 과정
율방은 음율을 연행하는 공간을 말한다. 그러나 궐내의 궁정이 아닌 민간의 일정한 공간에서 풍류를 향유했던 곳으로 사대부가 홀로 인격을 도야하기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달리 여러 사람이 모여를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다. 조선조 16세기까지는 사대부들이 인격을 완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홀로 거문고를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악기를 연주하는 모임 공간으로서의 율방은 거의 없었다.
율방에는 선비들과 같은 비전문 음악인들, 전문음악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구체적인 사항은 조선 후기 기록에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풍류방 〈유춘오(留春塢)〉를 들 수 있다.
풍류방에서는 《영산회상》·〈여민락〉·〈보허사〉 등의 기악곡과 가곡ㆍ가사ㆍ시조 등의 성악곡이 주로 연주되었다. 17세기 이후로 풍류 모임을 갖는 풍류방 문화가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영산회상》은 처음 〈상령산〉 한 곡에서 9곡의 모음곡으로 발전하였고, 가곡도 〈삭대엽〉이 1ㆍ2ㆍ3으로 늘어나고, 소가곡에 해당하는 〈농(弄)〉ㆍ〈락(樂)〉ㆍ〈편(編)〉 계열의 곡이 늘어났다. 가곡보다 늦게 풍류방에 수용된 시조도 처음에는 평시조 한 종류만 있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사설시조 지름시조 등의 변화형이 생겨났다. 가사도 가곡보다 늦게 풍류방에 수용되었다. 풍류방에서 거문고·가야금·양금·생황 등의 악기를 연주했던 선비들 또는 전문음악인들은 자신이 연주했던 음악을 악보로 남겼다. 안상(安瑺)의 『금합자보』(1572), 양덕수(梁德壽)의 『양금신보』(1572),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유예지』 등이 그에 해당한다.
20세기에도 율방의 전통이 지속되었다. 지방 또는 율방에 따른 차이는 있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율방에는 산조, 판소리 나아가 잡가류 음악까지 수용되는 변화가 있었다. 20세기 전반기까지도 전국적으로 존재했던 율방이 20세기 후반에 들어 점차 사라지면서 이리, 구례, 정읍, 전주, 대전 등 일부 지역에만 그 전통이 전승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북의 이리(현 익산), 전남의 구례에서 전승되고 있는 풍류방의 음악인 이리향제줄풍류와 구례향제줄풍류는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받아, 국가로부터 전승지원을 받고 있다.
○ 설립 목적 및 설립 주체
풍류를 즐기기 위한 목적에서 활용된 공간으로 풍류방의 주체는 전문 또는 비전문 음악인들이었다. 오늘날에도 풍류를 즐기는 비전문 음악인들의 풍류모임이 존재하며, 그들이 활용하는 공간은 조선 후기 율방의 맥을 잇는 의미가 있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율방에 참여한 사람들은 율회(律會) 또는 율계(律契)와 같은 풍류회를 조직하였다. 대부분 선비들과 같은 비전문음악인이 주축이 되었지만, 간혹 장악원 소속의 전문 악사가 참여하기도 하였다.
성대중(成大中)은 그의 문집 『청성집』(靑城集)에 담헌의 유춘오에서 풍류를 즐기던 정황을 〈기유춘오악회(記留春塢樂會)〉로 남겼다. "담헌(湛軒) 홍대용은 가야금을 펼쳐 놓고, 성경(聖景) 홍경성은 거문고를 잡고, 경산(京山) 이한진은 퉁소를 소매에서 꺼내어, 김억은 서양금(西洋琴)의 채를 손에 들고, 장악원의 공인(工人)인 보안 또한 국수(國手)로서 생황(笙簧)을 불었는데, 담헌의 유춘오(留春塢)에서 모였다. 성습(聖習) 유학중(俞學中)은 노래로 흥을 돋우었다. 교교재(嘐嘐齋) 김용겸은 연장자라 상석에 임하였다.” 이 글에서는 홍대용이 가야금을 연주하고, 장악원의 악공 보안이 생황을 연주하는 등의 내용이 보이는데, 풍류방에서 선비들과 전문음악인이 함께 어울려 풍류를 연주했던 측면이 잘 나타나 있다.
율방에는 여성 음악인도 참여하였다. 16세기에는 석개, 18세기에는 계섬, 추월 등이 참여한 기록이 보인다. 『삼죽금보』(1841)에 있는 여창시조 악보는 19세기 중엽에 여성음악인이 율방에서 시조를 부렀음을 알려 준다.
○ 음악활동과 활동무대
율방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 풍류객들은 청중을 위해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음악을 즐기는 자체를 즐겼다. 물론 김홍도의 〈단원도(檀園圖)〉에서와 같이 김홍도가 혼자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고, 지인 2명이 그의 연주를 듣는 경우도 있었다. 사랑방이나 누정(樓亭)이 율방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지만, 풍류를 벌이고 즐기는 공간은 어디나 율방이 될 수가 있었다. 비전문 음악인과 전문음악인이 연주하는 악기의 구별이 명확히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비들은 주로 거문고ㆍ가야금ㆍ양금 등의 악기를 연주하였고, 해금ㆍ피리 등의 관악기는 전문음악인이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문음악인들이 율방에 참여할 때에는 일정한 보상을 받기도 하였는데, 19세기 이후로 그들의 상업적 공연 활동이 활발해졌다.
율방은 조선후기 본격적으로 풍류를 즐기던 공간으로 오늘날 지방의 향제풍류의 전승과 음악적 생산이 이루어지는 장이었다.
『금합자보 『삼죽금보』 『양금신보』 『유예지』 『청성집』
『향제풍류(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85. 문주석, 「조선 후기 ‘풍류방’에 관한 소고」, 『시조학논총』 18, 한국시조학회, 2002.. 송지원, 「조선시대 음악사회에서 여성음악가의 존재 양상」, 『한국음악사학보』 61, 한국음악사학회, 2018. 신은경, 「풍류방 예술과 풍류집단」, 『문학과 사회집단』, 한국고전문학회, 1995. 임미선, 「20세기 풍류방 문화의 지형과 역사적 변동」, 『한국음악연구』 59, 한국국악학회, 2016. 임미선, 「전북 향제풍류의 음악적 특징과 전승사」, 『한국음악연구』 33, 한국국악학회, 2003.
임미선(林美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