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문인 고산 윤선도가 사용했던 거문고.
고산유금은 해남 윤씨 가문에 전해지는 거문고로 본래 뒤판 1편, 앞판 4편으로 구성되었으나 앞판 2편이 파손되어 현재는 뒤판 1편과 앞판 2편이 남아 있다. 앞판은 오동나무, 뒤판은 밤나무로 되어 있으며, 목재의 연대 측정 결과는 15세기로 나타났다. 고산유금은 현재의 거문고보다 약간 작은 편이며, 앞판은 4개의 나무 편을 끼움 방식으로 조립하여 제작된 점이 특징이다. 거문고의 뒤판에 고산이 남긴 금을 뜻하는 ‘고산유금(孤山遺琴)’이라는 후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윤선도가 사용한 악기이며, 집안에서 대물림하여 사용한 악기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거문고 연주로 자신의 성정을 다스리려는 유가의 음악관을 지향하였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젊은 시절부터 거문고 타기를 즐겼으며, 거문고를 잘 탔던 반금(伴琴) 권해(權海)와의 교유를 여러 편의 시문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고산유금의 앞뒤판에 윤선도가 권해에게 지어 준 시구와 주자의 금시(琴詩) 일부 등 후손들이 새긴 명문이 있어서 윤선도 사후에도 해남 윤씨 가문에서 윤선도가 거문고에 담고자 했던 뜻을 기리며 고산유금을 계속 사용한 정황을 알 수 있다. 1982년 윤선도 고택에서 고산유금의 울림통 일부를 발견하였는데, 이때 발견한 고산유금과 국립국악원에서 복원하여 기증한 악기가 현재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 함께 소장되어 있다.
○ 치수 및 수종 고산유금의 뒤판 치수는 길이 130.16cm, 최대 폭 20.05cm, 두께 0.75cm이고 6개의 돌괘 구멍과 3개의 울림구멍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앞판 2편은 치수가 서로 다른데, 하나는 47.8cm, 다른 하나는 46cm 정도이다. 앞판 전체는 4개의 편을 끼움 방식으로 조립하여 제작되었다. 목재 수종은 앞판이 오동나무, 뒤판이 밤나무로 현재의 거문고 제작 수종과 일치한다. ○ 소장처(자)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전라남도 해남) 소장 ○ 제작 연대 및 사용자 사항 고산유금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한 결과 목재의 연대가 앞판은 1480년, 뒤판은 1425년으로 나타났다. 국립국악원의 『국악기연구보고서』(2010)에 따르면, 목재의 건조 기간이나 악기 제작 기간 등을 감안할 때 고산 윤선도가 생존 당시에 고산유금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 명문 내용 고산유금의 앞판에는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실려 있는 ‘금객구시 위작금계(琴客求詩 爲作琴誡)’의 시 20자가 음각되어 있다. 앞판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嗜慾心中淨(기욕심중정) 탐욕이 마음에서 절제되면 |
天機指下鳴(천기지하명) 천기가 손가락 아래서 울려 |
可令山水興(가령산수흥) 산수의 흥취로 하여금 늘 |
存沒子期幷(존몰자기병) 종자기와 함께 하도록 할 것이네 |
‘금객구시’의 시구 밑에는 ‘부용병수 제증반금(芙蓉病叟 題贈伴琴)’이라 쓰여 있다. ‘부용병수(芙蓉病叟)’는 ‘부용동의 병든 늙은이’라는 뜻으로 윤선도가 보길도의 부용동 세연정에서 지낸 것에서 유래한 자호이다. ‘제증반금(題贈伴琴)’은 ‘반금에게 지어 주다’라는 뜻으로, ‘반금’은 거문고를 잘 탔던 권해(權海)의 호이다. 이 명문 바로 아래 부분에 ‘오세손준각(五世孫懏刻)’이라는 문구가 음각되어 있어 ‘고산유금’ 앞판에 음각을 한 사람이 고산 윤선도의 5세손이자 공재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손자인 윤준(尹懏, 1720~1750)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앞판에는 명문 부분이 파손되어 ‘양중화(養中和)’만 나타나는데, 주자의 금시가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靜養中和氣(정양중화기) 고요히 중화의 기운 기르니 |
閑消忿慾心(한소분욕심) 성나고 욕심스런 마음이 사라진다 |
뒤판에는 ‘고산유금(孤山遺琴)’과 낙서 윤덕희(尹德熙, 1685~1766)의 낙관(尹德熙印)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금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국립국악원에서 1766년에 제작된 일송금(국립국악고등학교 소장)을 참고하여 고산유금의 복원 악기를 제작하였고, 복원 악기를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에 기증하였다.
고산유금은 앞판이 끼움 방식으로 제작된 점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거문고의 앞판과 뒤판은 통판으로 제작된다. 고산유금도 뒤판은 통판이지만 앞판은 4편을 끼워 조립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조립 방식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인지, 후대에 수리하는 과정에서 채택한 방식인지는 알 수 없다.
고산유금은 조선 후기 문인들의 음악생활 일면을 보여 주는 악기 유물이다. 해남 윤씨 가문에는 고산유금뿐만 아니라 윤선도의 증손 윤덕희가 사용했던 ‘아양금’의 일부가 남아 있고 거문고 악보인 『낭옹신보』가 전하고 있어 윤선도를 비롯하여 윤두서-윤덕희-윤준으로 이어지며 대를 물려 거문고 음악을 향유한 정황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사대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금론(琴論)과 풍류방의 음악문화가 한 가문에 수용되고 내면화된 단편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고산유금의 음악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국립국악원 편, 「고산유금 복원 제작」, 『2010 국악기연구보고서』, 2010. 원용문, 「윤선도의 문학관과 음악관」, 『시조학논총』 5, 한국시조학회, 1989. 조유미, 「『고산유고(孤山遺稿)』를 통해 본 윤선도의 거문고 인식」, 『人文科學』 44, 성균관대학교 부설 인문과학연구소, 2009. 김은자, 「해남윤씨 가문의 음악적 삶과 교유-공재(恭齋) 윤두서를 중심으로」, 『온지논총』 32, 온지학회, 2012.
김은자(金恩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