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 혹은 양손에 합죽선을 들고 부채와 춤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동작과 구도를 구현하는 전통춤의 하나이다.
부채춤은 권번에서 기생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무용가들과 여학교에서 부채춤을 발전시켜 췄고, 리틀 엔젤스의 부채춤은 수많은 해외공연을 통해서 세계에 알렸다. 현재는 초등학생부터 노인들까지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전통춤이 되었다.
부채 가운데 합죽선(合竹扇)ㆍ접선(摺扇)ㆍ접루선(摺壘扇)은 고려 시대에 발명되어 중국으로 전파될 정도로 발전하여 조선으로 이어진 전통 공예물이다. 양반층에서는 신분을 알리는 장식물로 사용했고, 그것을 모방해서 서민들까지 널리 애용했다. 무당춤이나 선비춤 등 전통연희에서도 부채를 들고 춤을 추지만, 이 경우는 부채가 춤의 주제가 아니라 보조적인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에 부채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부채춤은 부채를 한 손에 또는 양손에 각각 든다. 두 가지 춤의 형식들은 1930~40년대 권번의 기생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군산 소화권번 출신 장금도는 권번에서 수학할 때(1939~1942) 두 개의 부채를 들고 선배들과 함께 부채춤을 익혔다고 진술했으며, 월전 장우성이 그린 『푸른전복』(1941)에는 조선 권번의 민산홍이 한 개의 무당부채를 들고 있어 당시 부채춤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후 최승희, 김백봉 등 무용가들이 주로 여성들을 중심으로 추는 다양한 부채춤을 발표하여 대중화되었다.
통설적으로 부채춤은 김백봉이가 1954년도 서울 시공관에서 첫 개인공연을 가진 이후 부채춤의 창시자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월북한 최승희가 먼저 부채춤을 췄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남북의 적대적 상황에서 공개적 논의가 불가능했다. 최승희의 부채춤은 고려인 변월룡이 북한을 방문해서 그린 『무용가 최승희 초상』 작품에서 확인된다.(1953~4년 추정) 또한 1953년 강원도 ‘중공군 송별예술제’ 행사에 참여한 군무 부채춤 사진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 1930~40년경에 군산 소화권번에서도 부채춤을 췄다는 마지막 기생 장금도(張今桃, 1929~2019)의 구술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 부채춤은 권번의 정규과목이 아니라서 방과후수업을 통해 선배들과 함께 부채춤을 익혔고 춤의 형식은 〈검무〉처럼 2명에서 8명까지 짝수 인원이 서로 마주 보며 추었다고 진술했다. 전통 한복을 입고 사군자 등을 그린 합죽선을 양손에 든 상태에서 접고 펴는 간단한 춤의 구도로 시작했다고 한다. 음악은 삼현육각의 굿거리와 자진모리 장단으로 오늘날 〈남도 굿거리〉를 말한다. 군산은 쌀의 집산지로 많은 일본인들이 이주해왔고 상업 자본이 풍부하여 전국 예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크고 작은 각종 연회가 생기자 기생들은 흥을 돋구는 춤으로 부채춤을 췄다. 당시 지방에는 풍류방 혹은 율방을 중심으로 전국의 율객들이 모여 며칠씩 머물면서 삼현육각과 혹은 독주로 풍류 음악을 즐겼고 향제 줄풍류는 〈남도 굿거리〉를 포함한다. 부채춤 음악이 〈남도 굿거리〉를 사용하는 것은 호남 풍류방에서 놀던 기생들과 유관하다. 권번끼리의 다양한 교류로 군산에서 시작한 부채춤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신무용가 최승희와 김백봉의 부채춤은 각자의 춤사위로 다양한 형태로 발전시켰다.
20세기 초 여자들 개화를 목적으로 세운 여학교는 광복 이후 선생들의 지도하에 군무 부채춤을 췄는데 대표적 활동으로는 1959년 동명여고는 이승만 대통령 84세 생신 축하행사로 서울운동장에서 대형 매스게임 부채춤을 췄다.
부채춤은 한 손에 혹은 양손에 합죽선을 들고 움직임의 방향과 돌리고 감고 접고 펴는 등 많은 동작을 만들 수 있고 부채와 부채 연결을 통해 동작의 확대는 물론 다양한 구도를 만들어 화려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큰 특징이다. 부채춤의 의상과 부채 자체의 다양한 디자인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부채춤 의상은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일반 한복을 입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유사한 고구려 복장과 관을 쓴다. 전자는 기생과 최승희 그리고 일부 여학교에서 입었고, 후자는 부채춤을 위한 전문 의상으로 김백봉이 처음 입어서 여학교 무용으로 확산되었다. 합죽선은 부채살에 한지를 붙이는데 접고 펴는 소리의 효과는 춤의 역동성을 보여주지만 쉽게 찢어지는 단점이 있다. 최승희는 한지 대신 얇은 천으로 바꿔 견고한 부채를 만들었다. 김백봉의 삼불선 부채는 3개의 목단꽃으로 대체되었고 부채 끝에 털을 달아 움직임의 확산과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부채춤의 존재는 불과 100여년도 안 되었지만 온 국민이 다 아는 무용으로 탄생 된 것은 전문 무용가들의 활약도 있지만, 일반인들도 부채만으로 춤을 출 수 있다는 편리함과 단순하면서 화려한 모습에 쉽게 반응한 것으로 해석된다.
부채춤은 중국 조선족에서도 보인다. 1950년대 연변에서 30여명의 민간예인들을 조사하였는데 그 중 부채춤도 있었다. 1952년 연변 양창윤은 어릴적 무당과 사당들의 부채들고 춤을 추던 모습을 기억하여 8명이 추는 부채춤을 안무하였다. 그 이후로 부채춤은 발전과 변화를 거쳐 오늘날 조선족의 대표적인 춤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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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숙(申明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