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무강(聖壽無疆)》, 《성수무강인자(聖壽無疆引子)》, 《성수무강만(聖壽無彊慢)》
조선조 세종대 이래로 연주되어온 당악의 하나
《성수무강》은 『세종실록』 중 1421년(세종 3)의 기사에 처음 보인다. 당시 광효전 제향에서 임금이 재궁에서 나올 때 연주하는 악곡으로 정하였으나 이후로는 조참에서 임금이 어좌에 오를 때의 악곡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성종대에는 용도에 따라 《성수무강》、 《성수무강인자》、《성수무강만》으로 구별하였지만, 정조대에는 《성수무강인자》 만 보인다.
《성수무강》은 『고려사』「악지」에 보이지 않고, 『세종실록』 1421년(세종 3)의 기사에 처음 보인다. 이는 《성수무강》이 고려 전래의 당악이라기보다 조선 건국 이후 명조로부터 유입된 명나라 속악이거나 조선조에서 새로이 창작된 악곡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성수무강》이라는 곡 이름은 세종대에 《성수무강》으로 처음 등장하였지만, 성종대에는 용도에 따라 《성수무강인자》、《성수무강》、《성수무강만》 등 곡 이름이 다양해지는 변화가 있었다.
《성수무강》은 『고려사』「악지」에 보이지 않고, 『세종실록』 1421년(세종 3)의 기사에 처음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성수무강》이 고려 전래의 당악이라기보다 조선 건국 이후 명조로부터 유입된 명나라 속악이거나 조선조에서 새로이 창작된 당악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1421년(세종 3) 당시 광효전(廣孝殿) 제향(祭享)에서 임금이 재궁(齋宮)에서 나올 때 연주하는 악곡으로 정하였으나, 이후로는 주로 조참(朝參)에서 임금이 어좌(御座)에 오를 때의 악곡으로 쓰이게 되었다. 《성수무강》이라는 곡 이름은 조선조 세종대에 당악 《성수무강》으로 처음 등장하였지만,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된 당악의 악공 취재 곡목에는 《성수무강인자(聖壽無疆引子)》가, 향악의 악공취재 곡목에는 《성수무강》이 서로 다른 곡 이름으로 포함되어있다. 비록 곡 이름은 다르지만, 당악 《성수무강》을 당악기로도 연주하고 향악기로도 연주하였기 때문에 『경국대전』에서 당악공과 향악공에게 모두 시험 보인 것일 뿐이다. 한편, 성종대 『악학궤범』의 “시용하례급연향악(時用賀禮及宴享樂)”조에는 망궐례(望闕禮)、망궁례(望宮禮)、배표전(拜表箋)、하대비전(賀大妃殿)、조하(朝賀)、조참(朝參)、연향(宴享)에서 임금이 궁을 나올 때 《여민락만》 또는 《성수무강만(聖壽無彊慢)》을 연주한다고 하였다. 이는 당악 《성수무강》이 고취악으로 쓰일 때에는 《성수무강만》이라는 악곡 이름으로 칭해졌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성수무강만》은 『경국대전』에 보이는《성수무강인자》와 동일 곡으로 간주된다. 즉 정재에 쓰일 때는 《성수무강인자》로, 고취악으로 쓰일 때는 《성수무강만》으로 곡 이름을 구별하였다. 다만 동일한 악보일지라도 용도에 따라 악곡의 속도나 악기 편성의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까지 《성수무강인자》과 《성수무강만》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은 없다. 결국 세종대 고취악으로서의 《성수무강》이 성종대에 이르러 그 용도에 따라 《성수무강인자》、《성수무강만》、《성수무강》으로 곡 이름이 다양해지는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성수무강만》이라는 곡 이름은 『악학궤범』에만 전할 뿐, 이후 1785년(정조 9)의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성수무강인자》라는 곡 이름만 보인다. 이는 고취악으로 《여민락만》의 쓰임이 확대되면서 《성수무강만》은 자연 도태된 결과로 보인다. 한편, 1892년(고종 29)에 강녕전에서 행한 내진찬에서도 무동이 ‘장생보연(長生寶宴)’을 추었을 때 《성수무강》을 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임진진찬의궤』의 내용과 다르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임진진찬의궤』에 의하면, 1892년 9월 24일의 외진찬에서는 무동이, 9월 25일 내진찬에서는 여령이 정재를 공연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궤에서 구체적으로 무동과 여령의 이름을 지목한 것을 보면, 실록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임진진찬의궤』 권1의 “강녕전진찬의주”에 의하면, 진소선(進小膳) 다음의 진탕 절차에 《성수무강》을 연주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성수무강》은 향당교주의 아명으로 쓰인 것이므로 『경국대전』 이나 『악학궤범』에 언급된 《성수무강》과는 무관하다. 이러한 정황은 조선 전기의 당악 《성수무강》은 그 전승이 고종대에 이미 단절되어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성수무강》은 『고려사』「악지」에 보이지 않고, 세종대에 처음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고려 전래의 당악곡이 아니라 조선 전기에 새로이 창작되었거나 명조로부터 전래한 속악일 가능성을 지닌 악곡이다. 동일한 하나의 악곡을 용도에 따라 정재에 쓰일 때는 《성수무강인자》, 고취로 쓰일 때는 《성수무강만》, 향악 악공의 취재곡으로 쓰일 때는 《성수무강》으로 칭하였다. 일반적으로 당악곡에는 곡 이름만 있거나 곡 이름에 붙여진 세주 명칭에 따라 그 악곡의 성격이 구별되는데, 《성수무강》의 경우에는 그러한 예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결과적으로 정조대의 문헌에서 《성수무강인자》만 보이는 것은 세종대의 《성수무강》이 《성수무강인자》라는 곡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악학궤범(樂學軌範)』 『대전통편(大典通編)』 『임진진찬의궤(壬辰進饌儀軌)』
정화순(鄭花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