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이패
장타령패, 장타령꾼
각설이패는 집집 문전을 찾아가거나 거리나 장터에서 〈각설이타령〉을 부르며 흥을 돋우거나, 웃음 혹은 동정심을 유발하는 흉내내기나 몸짓으로 상대방의 감성을 자극하여 돈이나 음식을 얻어내는 사람이다. 단독으로 혹은 소규모의 집단을 지어 이동한다. 오늘날에는 〈각설이타령〉의 후렴 장단인 ‘품바’를 축제장이나 광장에서 하는 공연 양식의 명칭으로 쓰는 사례가 확산되고 있다.
각설이패는 말이나 몸짓으로 음식이나 돈을 구걸하는 거지나 동냥아치와는 달리 〈각설이타령〉을 중심으로 무언가 노래를 하여 대가를 받는 유랑 연희자의 일종이다. 문헌상 각설이패 혹은 장타령꾼에 대한 기록이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의 〈박타령〉과 〈변강쇠가〉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편에 실린 조신설화(調信說話) 가운데 젊은 승려 조신이 꿈 속에서 어렵게 김낭과의 사랑을 이루어 부부가 되어 30년을 살았으나 생활이 너무나 궁핍해지고 일할 터전조차 없는데다가 뜻밖에 병이 걸리고 몸이 쇠약해져 남의 문전에 걸식을 하는 창피한 일까지 지금 겪게 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구걸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후 조선왕조의 『세조실록』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는 상소문(上疏文)에서 백정의 한 부류 가운데 유랑하며 ‘악기를 타며 구걸하는 자(作樂丐乞)’들이 어떻게 정착생활을 하도록 정책을 펼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음악을 구걸의 수단으로 하는 유랑인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판소리꾼, 풍각장이패, 산대놀이패, 꼭두각시놀이패, 남사당패, 사당패, 광대패, 굿중패, 초라니패, 각설이패 등 변별된 명칭으로 다수 등장한다. 이들의 연희 내용이 중복되기도 하겠지만, 어느 정도 변별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각설이패들은 장터와 거리, 잔칫집과 초상집,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이나 돈을 얻기 위해 〈각설이타령〉을 불렀다. 유랑하면서 걸식하는 과정에서 청중들에게 보답하기 위한 용도로 오락적인 흥겨움과 축원의 의미를 담아 부르는 노래로 사용되었다. 요즘은 지역 축제나 전국의 장터, 잔치, 여러 공연장에서 엿장수를 겸한 품바 공연단에 의해 이벤트성 공연으로 연행되고 있다.
각설이패는 유랑하며 걸식하는 예인 집단으로 재인 광대 출신이나 몰락한 양반, 소외된 지식인, 민간의 노비, 유랑 농민, 천민 계층의 사람들이 거지로 떠돌다가 각설이패에 이합집산하였을 것으로 본다.
조선 후기 각설이패의 활동 양상은 유랑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희극적으로 형상화한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의 〈박타령〉과 〈변강쇠가〉를 통해서 활동 양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박타령〉에서 놀보가 박을 탈 때 기대하던 보물이 아니라 박통 속에서 온갖 잡색이 나와 안마당을 시장판으로 알았는지, 소동을 피우는 대목에 걸인, 사당, 검무장이, 풍각장이에 이어 각설이패가 줄줄이 등장한다. 각설이꾼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었는데, 상투 얹을 자리를 밀어버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덤벙거리며 여러 장터의 지명을 동음이의어로 나열하는 〈장타령〉을 부른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를 때 다른 사람은 옆에 서서 두 다리를 빗디디고 허리와 고개를 놀리는 동작으로 노래의 흥을 돋우며 대목마다 헌 부채를 탁탁 치며 “잘한다 잘한다”하며 추임새를 넣는다.
〈변강쇠가〉에는 각설이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활동한다. 옹녀가 남편 변강쇠의 송장을 혼자서 처리할 수 없자 지나가는 가객ㆍ풍각쟁이ㆍ초란이 등 유랑 예인을 차례로 불러들이는데, 이들도 동티가 나서 모두 죽어 버렸다. 이때 마침 각설이 세 명이 나타나자 옹녀는 송장마다 삯을 닷 냥씩 쳐 줄 테니 치워 달라고 하자, 각설이패가 〈장타령〉을 부른 뒤에 송장을 메고 북망산을 향한다. 송장이 등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고생하지만, 각설이 세 명은 결국 송장을 떼어내 묻어 주고 돌아간다.
각설이패는 〈각설이타령〉을 불러 대가를 받는 유랑 예인이지만, 사례만 받을 수 있다면 온갖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는 최하층 신분으로 여겼다.
1929년에 발행된 잡지 『별건곤』에는 〈팔도장타령 – 각살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각 지방의 〈각설이타령〉을 수록하였다. 서두에 “〈장타령〉을 걸인의 허튼 수작으로만 여기면 무식한 짓이다. 〈장타령〉이란 원래 각 도의 〈시장타령〉이니 짧은 구절일망정 지방마다의 특산물ㆍ인정ㆍ풍속의 특수한 점이 나타나 있어서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각설이타령〉의 가사에는 각설이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하여 노래하며, 거지 행색으로 나타난 지금의 모습만으로 나를 평가하지 말아 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얼시구나 잘한다. 품바하고 잘한다. 작년에 왔던 각살이. 죽지 않고 또 왔네. 어화 이놈이 이래도 정승판서 자제로서, 팔도감사 마다하고 돈 한푼에 팔려서 각살이로 나섰네. 지리구 지리구 잘한다. 품바품바 잘한다. 네 선생이 누구신지 날보다도 잘한다. 시전 서전을 읽었는지 유식하게도 잘한다. 논어공자를 읽었는지 대목대목 잘 한다’는 식이다. 사실 나는 좋은 집안의 출신인데 사정이 있어 이런 모습으로 왔으니 보이는 현재의 모습만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아 달라는 메타포를 깔아 둔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표현 방식은 〈각설이타령〉의 특징에 숨겨져 있는 신분 역전의 반전 드라마의 묘미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까지도 전국 각지를 떠도는 각설이가 있었고, 이들은 집단을 이루어 활동하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는 방식으로 삶을 이어갔다. 이들은 농촌의 변두리에 작은 마을을 이루기도 했고, 도회지의 다리 밑이나 산자락에 터를 잡고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하다가, 자유롭게 구걸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며 문전이나 거리에서 각설이패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필자는 1970년대 중반에 전라남도 어느 산자락에 있는 천사촌이라 불리는 각설이패의 집단 거주지 인근에서 생활하며 각설이의 활동과 〈각설이타령〉을 조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천사촌이란 공식적인 지명이 아니었다. 이는 거지 마을의 부정적 이미지를 반어법으로 승화시킨 지역민들이 붙인 미칭이었다. 천사촌에는 독신자도 있고,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각설이도 있었다. 당시 〈각설이타령〉은 따로 스승에게 배우지 않아도 소리가 걸직하고 넉살이 좋으면 구걸 현장에 나설 수 있는 노래이며, 시선을 끄는 동작이나 흉내내기는 고도의 수련이 필요한 기예는 아니라고 했다. 단 〈각설이타령〉의 가사는 각 시대 대중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즉흥적인 요소를 가미하며, 여럿이 부르며 추임새를 넣어 주거나, 몸짓으로 분위를 고조시키려면 집단을 이루어 활동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여겼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각설이패가 변형된 모습의 품바라는 명칭으로 재등장하였다. 품바는 각설이패의 용어로 입방구소리라고 하는데, 추임새로 노래 도중에 넣는 ‘품바 품바’라는 말에 연원이 있다. 특히 1980년대에 각설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창작 1인극 제목이 ‘품바’였다. 대학로에서 시작된 연극이 많은 관객을 모으며 기록적인 장기 공연이 이루어지며, 품바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축제장에 짙은 화장을 하고 울긋불긋한 천 조각을 흰 바지저고리에 꿰매 붙인 모습으로 〈각설이타령〉을 부르면서 우스갯소리와 몸짓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공연 양식이 품바공연으로 인식되어 많은 품바 연희단이 성립되었다. 이런 현상 속에 충청북도 음성군에는 지방 정부가 주최하는 음성품바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고, 전라남도 무안군에는 지방 정부가 주관하는 무안각설이품바전수관이 설립되어 연례적인 축제로 정착되고 있다. 각설이패의 〈각설이타령〉 혹은 〈장타령〉의 가사와 몸짓 등은 품위나 체면을 이미 내려놓은 위치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세로 임할 수 있는 연희자 집단의 예술혼의 산물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강은해, 「각설이타령 원형(原型)과 장(場)타령에 대한 추론(推論)」, 『국어국문학』 85, 1981. 박전열, 「각설이타령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79 박전열, 「전통연희집단의 계통과 활동」,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2006. 장성수, 「각설이타령의 담당층과 구조 연구」 『문학과 융합』 16, 1995.
박전열(朴銓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