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림조(河臨調), 잉(剩), 고선궁평조(姑洗宮平調)
조선 전기에 현금(玄琴)、향비파(鄕琵琶)、가야금(伽耶琴) 음악에 쓰인 악조의 한 종류
청풍체(淸風體)는 『악학궤범(樂學軌範)』 권7 “현금(玄琴)”조、“향비파(鄕琵琶)”조、“가야금(伽耶琴)”조에 보이는 악조로서 하림조(河臨調) 또는 잉(剩)이라고도 한다. 그 악조는 일반적으로 고선궁평조(姑洗宮平調)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악학궤범』에 보이는 청풍체는 “현금”조、“향비파”조、“가야금”조를 막론하고 모두 선법(旋法)의 명시가 없이 단지 “고선궁(姑洗宮)”이라고만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조 이름에 ‘~조’가 아닌 ‘~체’가 붙은 점에서 특이하다. 왜냐면 동일한 옛 악조이면서『악학궤범』현금조에 명시된 최자조(嗺子調)나 탁목조(啄木調)에 대해서는 각각 태주계면조(太簇界面調), 황종궁평조(黃鍾宮平調) 등 중심음과 선법이 동시에 제시되었고, 조 이름에 ‘~조’가 붙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청풍체를 고선궁평조(姑洗宮平調)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 산형(散形)에 “일지(一指)”라 명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와 향비파의 괘상(棵上)이나 가야금의 각 현에 명시된 율명(律名)이 <고․유․남․응․청대>로서 5음음계 고선궁평조의 구성 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청풍체는 이론상 선법 면에서는 평조에 해당하고, 기본 음 면에서는 『악학궤범』 칠지(七指) 중 일지(一指)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풍체와 칠지(七指) 중의 고선궁평조는 조현법과 사용 음위(音位)가 서로 다른 별개의 악조이다. 청풍체의 다른 이름인 하림조는 눈죽조(嫩竹調)와 함께 신라시대의 가야금 음악에 쓰이던 악조였다. 1430년(세종12) 당시 옛 하림조의 악곡들은 이미 다 유실되었고 단지 악조의 이름으로만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옛 악곡의 수집 사업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하림조가 청풍체라는 이름으로 『악학궤범』에 재등장하게 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하림조의 “하림”은 진흥왕의 별궁인 하림궁과 이름이 같다. 551년(진흥왕12)에 진흥왕은 그 곳에서 우륵과 이문을 청하여 그들의 음악을 감상하였는데, 당시 우륵과 이문은 기존 악곡들을 연주하지 않고 새로운 노래를 창작하여 연주하였다. 또 청풍체의 “청풍”은 정도전이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을 “청풍명월(淸風明月)”로 평한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훗날 정조와 규장각 학사인 윤행임(尹行任) 역시 충청도의 기질을 “청풍명월”이라는 4자 단구로 표현하였고, 오늘날에도 청풍명월은 충청도의 정서를 대변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즉 청풍체의 “청풍”은 충청도를 대변하는 청풍명월과 상관되고 거기에 “체”를 붙여 “충청도 스타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혹자는 “청풍”을 제천 소재의 청풍이라는 특정 지역으로 연결하기도 한다. 따라서 청풍은 광의로는 충청도가 되고 협의로는 청풍지역이 된다. 1430년(세종12) 당시 하림조의 모든 곡들이 없어진 상황에서 진행된 옛 악곡의 수집 사업에서 옛 하림궁 인근을 중심으로 충청지역의 음악이 수집되자 그것들을 하림조로 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청풍체라는 조이름이 쓰여지게 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광의든, 협의든 청풍체의 음계구조는 오늘날의 충청도 민요와도 다르지 않다. 청풍체는 『악학궤범』 이후의 문헌에서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오직 선조대의 악보인 『금합자보(琴合字譜)』(1572)에 그 산형(散形)이 수록되어 전할 뿐이다. 그러나 『금합자보』소재 청풍체는 단순히 『악학궤범』 소재 청풍체의 산형을 재수록한 것일 뿐, 당시의 거문고 음악과는 전혀 무관하다. 『금합자보』에는 『악학궤범』 소재 향악조의 산형을 먼저 제시한 뒤, 이어 당시의 거문고 조현법과 음위와 상관되는 ‘금도(琴圖)’를 별도로 명시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금합자보』에 수록된 각 악곡의 악보에도 청풍체의 악곡이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청풍체는 성종 이후로 더 이상 전승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三國史記』 『世宗實錄』 『樂學軌範』 『琴合字譜』
정화순(鄭花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