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후 1945년 10월 창악인들 중심으로 설립되었다가 1961년 해산된 국악단체
1945년 10월 창악인들 중심으로 설립된 국악인 단체이다. 함화진(咸和鎭)을 비롯하여 박헌봉(朴憲鳳)과 함께 조직을 이끌었으며 애초에 ‘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조직하고 그 산하에 창극 전담 기구인 ‘국극사’를 두고 미군정기간 3년간 창극공연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전국농악대회’크게 열어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나 좌우익 갈등이 심해지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소속 음악인 중에 중요 인물들의 월북이 이어져 활동이 위축되었다. 게다가 이왕직아악부의 후신이었던 구왕궁아악부의 국영안이 국회에 통과하면서 ‘국립국악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전쟁 중인 1951년 개원하자 이를 구별하기 위해 ‘대한’을 붙여 ‘대한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산하에 민속음악 단체들을 두고 활동하였다가 1961년 12월 한국국악협회로 통합되어 자연 해산되었다.
해방직후인 1945년 8월 16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음악건설본부 국악위원회가 급히 구성되었다. 이후 국악건설본부로 개칭되었다가 같은 해 8월 29일 조선음악건설본부에서 독립하면서 국악회로 변경되었다. 이 국악회(國樂會)가 규모와 체제를 갖추어 국악원(國樂院)으로 명칭을 바꾸고 1945년 10월 10일에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위원장은 이왕직아악부 아악사장을 지낸 함화진, 부위원장은 국악이론가 박헌봉, 총무국 유기룡, 문화국장은 아악수장을 지낸 장인식 등이었다. 당시 구성원의 주축은 창악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기악연주자들과 아악계의 원로와 중진들이 단체의 임원으로 참여하였다.
○ 설립목적
국악원의 설립목적은 독특한 조선 국악의 원리를 파악하고 체계적 이론을 세우는 것이 목적인데, 더 구체적으로는 『신조선보』 1945년 11월 9일자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세계음악사상 에 독특한 조선국악의 원리를 파악하여 조선 국악의 체계적 이론을 수립하고 진지한 연구와 완전한 발전을 기함. 1. 조선전통의 음악예술을 확보하고 과거 특권계급에게 독점되었든 음악예술을 조선 민중에 절대 개방을 기함. 3. 본악이나 외래악을 물론하고 저열경부한 음악은 철저히 배격하고 전통적 유아명랑하고 순수한 신조선 음악건설을 기함.이라고 하고 있으며 『경성일보』 1945년 11월 9일자에는 국악학교, 국악극장 건설, 국악문헌, 악기 수집, 정리, 국악잡지 발간을 활동방향으로 설정하고 있다.
○ 조직체계와 구성원
국악원의 본부는 다옥정 92번지에 두었다고 하고 설립 당시의 조직체계와 주요 구성원을 보면, 위원장 함화진(咸和鎭), 부위원장 박헌봉(朴憲鳳), 총무국장 유기룡(劉起龍), 문화국장 함화진, 사업국장 임서방(任曙昉)이다. 분야는 아악, 창악, 무용, 민요, 속곡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아 단체 내에는 아악부·정악부·기악부·창악부·무용부가 있었고, 사업국내에 국악학교기성회·국립극장설치위원회·국악기관지 발간 준비위원회·문헌악기 수집위원회를 두어 국악의 연구와 발전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직속 창극단체로 국극사를 두었다. 위와 같이 기사는 간략하게 나와 있지만 지금까지 연구에 의하면, 설립 당시 국악원은 3개국(총무국, 문화국, 사업국), 12개부(서무부, 재정부, 지방부, 아악부, 정악부, 창악부, 속곡부, 민요부, 문예부, 연구부, 기획부, 운영부)로 구성되었으며 산하단체로 국극사를 두었음. 이후 1947년 4개국(총무국, 공연국, 문예국, 기획국), 9개부(총무부, 서무부, 악부, 민요부, 기악부, 무용부, 국극부, 연구부, 선전부)로 개편되었고 산하단체로 국극사, 여성국악동호회, 여성국극동지사, 연예단, 민요단체를 두었다고 한다.
○ 음악활동
결성 초기의 공연활동은 판소리 공연과 창극단체 활동이 많았다. 국악원창설기념 제1회 발표회의「대춘향전」은 아악·창악·민요·무용을 종합구성하고 전국의 음악인 130여명이 출연하는 등 기존의 창극에서 볼 수 없었던 공연이었다.
1946년부터는 ‘전국농악경연대회’·‘전국향토민요대회’·‘민속무용발표대회’ 등의 주요 활동을 하였다. 1946년부터 세 차례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는 일제강점기 동안 위축되었던 민중적 음악을 활성화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규모는 방대했다. 심사위원은 국악·연극·미술·무용·체육·문학·음악(서양)·채보 등을 둘 정도로 행사는 단순히 음악이 아닌 문화계 인사 전반이 참여했다.
1947년 8월 민족좌파를 비합법화하여 좌익계인사가 대량으로 검거되면서 국악원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검거되었다. 이때 위원장 함화진이 피검되었고 간부들이 바뀌고 활동이 위축되었다. 1950년 1월 구황궁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자 국악원도 대한국악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었다. 대한국악원으로 변경의 시기는 뚜렷하지 않고 다만 신문 기사 상으로 1952년에 처음 보인다. 전쟁이 끝난 후 대한국악원은 각종 국극 단체의 연합체로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삼성, 낭랑, 화랑, 낭자, 여협, 새한, 진경, 동명, 새봄 등의 여성국극단이 모두 국악원 소속이었다. 이외에도 대한국악원은 국악 강습회를 개최하며 국악발전과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나 1961년 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 산하 한국국악협회로 통합되었다.
광복 직후 설립된 전통음악인들 조직 중 가장 큰모의 국악단체로서 민속음악계의 음악인들이 하나의 단체에서 활동한 최초의 단체이며, 농악·민요·무용 등 그동안 대중공연에 소외되었던 민속음악이 예술의 한 부문으로 부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수정, 「해방공간 전통음악계의 흐름」, 『민족음악의 이해』 4, 민족음악연구회, 1995. 김민수, 「1950년대 민속악계의 공연활동 고찰-대한국악원을 중심으로」, 『한국음악사학보』 57, 한국음악사학회, 2016. 김민수, 「1950년대 국악계의 동향-국립국악원과 대한국악원의 활동을 중심으로」, 『음악과현실』 57, 민족음악학회, 2019.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