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조직하여 1945년 8월 일본 패망 직후까지 활동한 일제강점기 최대의 친일 어용 음악단체
조선음악협회는 1941년 일본제국주의의 황민화 정책과 병참기지화 정책에 부응하여 일본정신을 구현하는 일본국민음악 건설을 목표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음악인들 포함하여 조선인 음악인을 망라하여 조직한 친일음악 단체이다.
조선음악협회는 1941년 1월 11일에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정인 카츠 코오준(桂珖淳)과 학무국 촉탁인 히라마 분쥬(平間文壽)가 주도하고 피아니스트 김영환, 경성 제1고등여학교 음악 촉탁 오오바 이사노스케(大場勇之助) 등 15명으로 구성된 발기인 모임을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가졌으며 1월 25일 발회식을 하고 3월 25일자로 공식 결성, 조선총독부에 등록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미 1937년 조선문예회,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서 활약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들이 주요 임원이나 적극적 활동을 보인 사람이다.
○ 설립 목적 및 시기
조선음악협회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에 “악단을 통하여 직역 봉공하고 조선음악계의 신체제 운동을 전개한다”라는 목표 아래 1941년 1월 25일 발회식을 하고 3월 25일자로 공식 결성성된 조직이다. 작곡가, 연주가, 음악교육가, 음악평론가, 음악문필가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었다. 1944년 7월 11일에는 협회의 회칙개정과 역원 개편의 변동이 있을 때, “일본정신을 구현하는 국민음악의 창조 발전과 음악가의 자질 연마를 촉구하고 일본문화의 향상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함으로써 더 세부적 목적을 부여하였다.
○ 조직의 구성
결성 당시인 1941년의 상하부 조직 관계는 회장, 고문, 전무이사, 이사, 간사, 평의원이었다. 회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국장이 맡았으며, 계정식(桂貞植) 김원복(金元福) 김재훈(金載勳) 함화진(咸和鎭) 현제명(玄濟明) 등과 일본인 13명이 이사로, 김세형(金世炯) 이애내(李愛內) 이종태(李鍾泰) 임동혁(林東爀) 홍난파(洪蘭坡) 등과 일본인 16명이 평의원으로 각각 참여했다. 조직은 방악부, 조선음악부, 양악부, 교육음악부 등 5개 부서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서 아래에는 지방별 지부도 두었다.
회원수는 결성된지 3개월 뒤인 1941년 8월에만 523명이었다. 방악부의 방악이란 일본음악을 말한다. 양악부의 부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히라마분쥬(平間文壽)이었고 회원으로는 강장일, 계정식, 김생려, 김성태, 김천애 현제명 공난파 등 당대 조선인 양악인 대부분인 146명이, 일본인 16명이 참여했다.
○ 조선음악협회 조직 내 조선음악부
1941년 당시 조선음악부는 부장 함화진을 포함하여 72명이 회원이었다. 회원은 강장완 고재덕 김경한 김광식 김광채 김봉업 김석구 김소희 김송죽 김수연 김순태 김아부 김여란 김연수 김영근 김영준 김재선 김정실 김주전 김천흥 김태운 민완식 박구명 박녹주 박동실 박만호 박상근 박석기 박영복 박천복 박초월 박춘재 박헌봉 박후성 서영희 신영채 신쾌동 신평일 심상건 엄태영 오태석 유개동 유기룡 이동백 이명길 이명산 이점룡 이정업 이창배 이충선 이치종 임서방 임소향 임유앵 임춘앵 장학선 정남희 정득만 정원섭 정채란 조몽실 조상선 지영희 최경식 최수성 최장술 최정식 탁복만 허상복 현철 등이다.
○ 음악활동
국민가요 보급과 연주를 통한 음악보국 운동이 주된 활동이었으며, 관제 행사에서 취주악과 합창으로 출연하는 등, 종전으로 해체될 때까지 약 4년 반 동안 활동을 벌였다. 1941년 6월에는 '음악보국주간 대연주회'를 개최하였고 1942년 1월 25일에는 조선음악협회 창립 1주년 기념 보국대회 개최, 1942년 7월 6일 : '지나사변 5주년 기념음악회'와 제1차 '조선음악무용 대제전' 개최, 1943년 3월 26일 : '전의 앙양 국민대합창음악회' 개최하였다. 또 1943년부터는 ‘국민가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3년 12월 12일 : 조선신궁에서 '문화단체 결의선양대회' 참가하였고 1944년 7월 26일에는 '국가봉납대회' 주최하였으며 9월 17일에는 제5회 '항공기 헌납 음악회' 후원하기도 했다. 1945년 1월 13일에서 14일에 '조선음악대연주회' 개최하였고 7월에는 '학도위안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일제강점 말기에 조직된 조선음악협회에는 당시 음악활동을 중단하지 않고서 지속하기 위해서는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음악활동은 황국신민서사를 외워 심사 받는 기예증 심사를 받아야 했고 조선음악협회에 회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음악협회는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까지 일본 국민가요 보급, 연주를 통한 음악보국 운동, 전함 및 비행기 헌납 음악회 개최 등의 행위를 했기 때문에 본인의 고유한 전문 영역의 음악활동을 하더라도 이를 충족시켜야 하고 동원되어야 했다. 국악인 역시 이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회원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당시 국악인의 규모까지 읽을 수 있는 이면성이 있다.
노동은, 「친일음악 연구상황과 전망Ⅰ」, 『민족문제연구』 여름호, 11, 민족문제연구소, 1996. 노동은, 「노동은의 알고 싶다10-조선음악협회는 어떤 친일단체이었나」, 『음악과 민족』 14, 민족음악학회, 1997. 노동은, 「일제하 음악인들의 친일논리와 단체」, 『음악과 민족』 25, 민족음악학회, 2003. 정수진, 「조선음악, 조선음악가의 곤란-오당 함화진을 중심으로」, 『한국민속학』 41, 한국민속학회, 2005. 강태구, 「경성후생실내악단에 관한 연구」, 『한국음악사학보』 48, 한국음악사학회, 2012. 이예원, 「일제강점기 정악대회의 성격과 의미」, 『한국음악사학보』 67, 한국음악사학회, 2021.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