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工人)
조선시대 아악 연주[노래 포함]와 일무(佾舞)를 담당한 악인(樂人)
악생은 조선 세조대(1455~1468) 악제 개혁과 함께 악공의 대칭어로 쓰이게 된 용어로서, 양인(良人)인 아악 연주자를 뜻했다. 이에 반해 악공은 속악연주자로서 천인(賤人)이었다. 악생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제례 아악인데, 속악을 쓰는 둑제(纛祭)의 음악과 춤도 담당했다. 조선 전기 법전인 『경국대전』(1485년)에는 악생의 정원을 297인으로 명시하였고, 후기 법전인 『속대전』(1746년)에는 195인으로 명시하였다. 조선 후기는 아악 악현(樂懸)과 일무의 규모를 전기에 비해 많이 줄였기 때문이다.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아악ㆍ당악ㆍ향악 등 어느 음악 양식이든 연주자를 뜻하는 용어로 악공이나 공인이 널리 쓰였다. 그러나 1457년(세조 3)에 악제개혁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당악과 향악 등의 속악 연주자만 악공이라 호칭하고, 아악 연주자에 대해서는 악생이라는 호칭을 썼다. 즉, 악생은 양인으로서 장악서 좌방(左坊) 소속의 아악 연주자, 악공은 천인으로서 우방(右坊) 소속의 속악 연주자를 뜻했다. 그러나 악생과 악공은 아악과 속악을 겸해 익힐 것이 권장되었다.【세조 3년 11월 27일(丁亥), 세조 4년 7월 1일(丙戌)】
조선 초에 궁중음악은 악학(樂學)ㆍ봉상시(奉常寺)ㆍ아악서(雅樂署)ㆍ전악서(典樂署)ㆍ관습도감(慣習都監)의 다섯 기관에서 관할하였다. 이 당시는 악공 또는 공인이 아악과 속악 연주자 모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풍운뇌우(風雲雷雨)ㆍ사직(社稷)ㆍ문묘(文廟)ㆍ선농(先農)ㆍ선잠(先蠶)ㆍ우사(雩祀) 등의 제사에서는 아악을 썼는데, 아악서 악공이 악기 연주, 봉상시 재랑(齋郞)이 노래와 문무(文舞), 봉상시 무공(武工)이 무무(武舞)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세조대(1455~1468) 악제 개혁 이후 음악기관이 장악원으로 일원화되면서, 악생은 양인의 아악 연주자, 악공은 천인의 속악 연주자를 뜻하는 용어로 확립되었으며, 제례아악의 악기연주 및 노래와 문무ㆍ무무는 장악원 좌방 소속의 악생이 도맡았다. 악생은 그 자제들이 악생역을 기피하는 통에 한잡인(閑雜人, 役없이 놀고 있는 사람)이나 각사 서리, 군병들로 보충되었다고 한다.
악생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악을 쓰는 제례에서 악기연주ㆍ노래ㆍ일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이들은 편종(編鐘)ㆍ편경(編磬)ㆍ금(琴)ㆍ슬(瑟)ㆍ소(簫)ㆍ생(笙)ㆍ훈(塤)ㆍ지(篪)ㆍ약(籥)ㆍ적(篴)으로 아악 을 연주하고, 풍운뇌우ㆍ사직ㆍ문묘ㆍ선농ㆍ선잠ㆍ우사의 악장을 노래하였으며, 문무ㆍ무무를 추었다.
이뿐 아니라 악생은 속악을 연주하는 둑제에서도 초헌ㆍ아헌ㆍ종헌에 각각 〈납씨가(納氏歌)〉를 부르며 〈간척무(干戚舞〉ㆍ〈궁시무(弓矢舞)〉ㆍ〈창검무(槍劍舞〉를 추고, 철변두에 〈정동방곡(靖東方曲)〉을 불렀다.
성종대(1469~1494)의 사직ㆍ문묘ㆍ선농ㆍ선잠 등의 제사에는 등가에 62인, 헌가에 124인, 문무에 50인, 무무에 58인, 총 294인의 악생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경국대전』(1485년, 성종 16)에 ‘악사(樂師) 2인과 악생 297인【예비인원 100인】을 둔다.’라고 명시하였다.
300명가량의 악생은 임진왜란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유지되었으나,【『선조수정실록』선조 27년 4월 1일(己酉)】,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악생의 원수는 대폭 조정되었다. 1629년(인조 7) 당시 사직ㆍ문묘 등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등가에 22인, 헌가에 20인, 문무에 38인, 무무에 36인, 총 116인의 악생이 꼭 필요한 수라고 말할 정도로【인조 7년 6월 21일(甲戌)】, 조선 후기는 전기에 비해 아악의 악현과 일무의 규모를 줄였다. 일무를 예로 들면, 조선 전기는 아악을 쓰는 제례에서 문ㆍ무무에 매 일(佾)이 8인씩인 육일, 즉 48인을 썼는데, 후기에는 매 일이 6인씩인 육일, 즉 36인을 썼다. 또 전기에는 무무에 순(錞)ㆍ탁(鐲)ㆍ요(鐃)ㆍ탁(鐸)ㆍ응(應)ㆍ아(雅)ㆍ상(相)ㆍ독(牘)을 배치했는데, 후기에는 이를 없앴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법전인 『속대전(續大典)』(1746년, 영조 22)에는 악생의 정원을 195인으로 명시하였다. 그러나 1778년(정조 2) 악생 수가 90명에 불과할 정도로【정조 2년 11월 29일(乙卯)】, 악생의 정원을 채우지 못하여 제사 때 대년악생(待年樂生)으로 보충하거나, 악공과 악생의 자제를 임시로 고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삼국시대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악인들이 일본에 음악을 전해주었고, 삼국이 통일된 뒤에도 그들의 후예가 여전히 일본의 왕립 음악기관인 아악료(雅樂寮)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을 일본문헌에서는 고려악생ㆍ백제악생ㆍ신라악생으로 불렀다. 아악료의 아악은 단순히 궁중음악이란 의미로, 음악 양식으로서의 아악과는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일 뿐이다. 따라서 일본문헌에서 말하는 삼국의 악생과 조선 세조대 이후 장악원의 악생과는 개념이 다르다. 조선의 장악원 악생이 담당한 아악은 당악ㆍ향악과는 다른 특정 음악 양식으로서 ‘1자(字)ㆍ1음(音)ㆍ1박(拍), 4언1구, 7음 음계, 동일한 시종음(始終音)’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악생의 주요 임무는 제례 아악이다. 세종대왕 때 정비되어 현재까지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는 문묘제례악 및 1910년 일제 강점에 의해 중단되었다가 1988년에 복원되고 2000년에 중묘무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된 사직대제의 제례악은 악생들에 의해 전승된 것이다
『세조실록』 『경국대전』 『악학궤범』 『증보문헌비고』 송방송, 『악장등록연구』,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1980.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