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방악사(左坊樂師), 우방악사(右坊樂師), 집사악사(執事樂師), 집박악사(執拍樂師), 도창악사(導唱樂師)
장악원 잡직의 정식명칭은 아니고, 악공과 악생을 지도하고 궁중의례에서 음악과 춤을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는 악인(樂人)을 가리키는 경칭
악사는 오랜 세월 악(樂)을 익힌 자를 부르는 경칭으로, 전악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며, 음악 교육과 공연, 악기 제작의 감독, 악서와 악보 편찬 등 궁중음악의 중심축 역할을 하였다.
『주례(周禮)』 춘관(春官)에 ‘악사(樂師)는 국자(國子)에게 춤과 악의(樂儀)를 가르치고, 악정(樂政)을 다스리며, 악을 쓸 때 종(鐘)ㆍ고(鼓)를 연주하도록 명한다. 군대가 승리의 공을 종묘ㆍ사직에 바칠 때 〈개가(愷歌)〉를 가르쳐서 부르게 한다.’라고 한 것에서 보듯이, 악사의 유래는 오래되었으며, 춤과 노래를 가르치고 악(樂)을 지휘하는 자를 뜻한다.
악사(樂師)는 오랜 세월 악(樂)을 연마한 자를 부르는 경칭으로서, 악공과 악생에게 악가무(樂歌舞)를 교육시키고 궁중의례에서 악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자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1742년(영조 18) 당시 악공이었던 황세대(黃世大)는 1744년(영조 20) 진연 때 외연의 집사전악(執事典樂)을 맡은 악사였고, 악사 장천주(張天柱)는 사은사(謝恩使)를 따라 중국에 가서 생황을 배우고 1766년(영조 42)에 돌아와 악공에게 생황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악학궤범』(1493년)에 ‘시용전정헌가(時用殿庭軒架)와 시용전정고취(時用殿庭鼓吹)에 협률랑(協律郎)과 집박(執拍)을 맡은 악사 두 명이 배치되고, 정전예연(正殿禮宴)에는 협률랑ㆍ정재집박(呈才執拍)ㆍ전후고취집박(殿後鼓吹執拍)을 맡은 악사 세 명이 배치된다.’라고 하였는데, 협률랑은 의식 절차에 맞추어 휘(麾)를 들어 올리거나 눕힘으로써 음악 연주와 정지 시점을 지휘하고, 집박은 협률랑의 지휘에 따라 박을 침으로써 연주를 시작하게 하거나 그치게 하였으니, 궁중의례에서 악사가 악(樂)을 총 진두지휘한 셈이다. 훗날 협률랑은 장악원 관원으로 대체되었지만, 악사가 악가무의 실질적인 총 책임자임은 변함없다. 악사는 종6품의 부전악(副典樂)이나 정6품의 전악으로 임명되었다. 전악은 하는 일에 따라 집사전악(執事典樂), 대오전악(隊伍典樂), 집박전악(執拍典樂), 풍물감조전악(風物監造典樂), 도창전악(導唱典樂), 선창전악(先唱典樂) 등으로 불린다. 전악의 직함을 통해 악사의 일을 유추할 수 있다. 집사전악은 음악을 총괄하는 자, 대오전악은 대열을 살피는 자로 보이고, 집박전악은 음악의 시작과 끝을 박을 쳐서 알리는 자이고, 풍물감조전악은 악기의 개조(改造)나 조성(造成)을 감독하는 자이며, 도창전악과 선창전악은 악장을 노래하는 자이다.
한 행사에서 여러 역할을 맡을 경우 그에 따라 각각의 명칭이 부여되었으니, 1829년 진찬 때 서인범과 김창록이 외연(外宴)에서는 선창전악을 맡았고 내연(內宴)에서는 대오전악의 소임을 맡았으며, 성시문은 집사악사와 감조전악, 김광국은 집사악사와 고취집박전악(鼓吹執拍典樂)의 소임을 겸해서 하였다.
악사에서 전악이 임명되므로, 악사와 전악의 용어가 서로 동시적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갑자진연의궤』(1744년)에 따르면, 우방악사 강취성이 1744년 진연 때 풍물감조전악(風物監造典樂)으로, 우방악사 함덕형이 내연과 외연의 집사전악으로 활동하였다. 그 외에 문영담ㆍ김윤신ㆍ고중엽ㆍ성시문이 『자경전진작정례의궤』(1827년)의 공령(工伶)에서는 전악으로, 상전(賞典)에서는 악사로 기록되었고, 김창하는『무자진작의궤』(1828년) 부편(附編)의 찬품(饌品)과 상전에서는 전악으로, 공령에서는 악사로 기록되었다.
악사의 음악적 소양은 악서(樂書)와 악보 편찬 등에서도 발휘되었다. 예조판서 성현(成俔)이 전악 박곤(朴𦓼)ㆍ김복근(金福根) 등과 함께 『악학궤범』을 편찬하고, 장악원 첨정 안상(安瑺)이 악사 홍선종(洪善終)ㆍ허억봉(許億鳳)ㆍ이무금(李無金)의 도움을 받아 『금합자보(琴合字譜)』를 편찬하였으며, 악사 양덕수(梁德壽)가 『양금신보(梁琴新譜)』를 편찬한 것 등이 그 예다.
갑오개혁(1894년) 이후 장악기관의 명칭과 상위기관 및 직제가 변하면서, 악사의 개념과 지위는 이전과 달라졌다. 즉, 갑오개혁 이전 예조 소속 장악원이 ‘제조(提調), 정(正), 첨정(僉正), 주부(主簿), 전악, 부전악, 전률(典律) 등’으로 구성되고, 악사에서 전악을 뽑을 때의 악사는 경칭일 뿐이고, 1905년 예식원(禮式院) 장악과가 ‘제조 2인, 악사장(樂師長) 1인, 악사 2인 이하, 주사(主事) 3인’으로 구성된 때의 악사는 공식 직제명이다.
1907년에 군대 해산으로 군악대의 일부 대원이 장례원(掌禮院) 장악과에 편입되면서 제조가 없어지고 ‘국악사장 1인, 국악사 2인, 악사장 1인, 악사 2인’으로 재편되었는데, 이 경우 국악사장과 국악사는 국악을 담당하였고, 악사장과 악사는 군악대가 연주했던 양악을 담당하였다. 한일합방 이후 국악사장과 국악사는 아악사장과 아악사로, 악사장과 악사는 양악사장과 양악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한편, 악사(樂師)와 동음이의어로 악사(樂士)가 있는데, 경칭으로 쓰인 악사(樂師)와는 다르다. 악사(樂士)는 궁중음악 뿐 아니라 민속 가면극이나 무당의 굿판에서의 음악 연주자까지 포함하는 악인을 뜻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악사(樂師)는 교육과 연주를 통해 전통음악 계승의 중심에 있는 자에게 존경의 뜻을 담아 부여한 호칭이다.
『악학궤범』 『경국대전』 『영조실록』 『갑자진연의궤』 『기사진표리진찬의궤』 『자경전진작정례의궤』 『무자진연의궤』 『기축진찬의궤』 이정희, 『대한제국 황실음악』, 민속원, 2019.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