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무동연희장, 용산무동연희장
전문적 연희자들이 흥행을 위해 아현과 용산에 설치해 운영했던 상설 야외공연장
1902년 봉상시(奉常寺) 안(현재의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에 설치되었던 희대(戱臺), 즉 협률사(協律社)는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이었다. 반면에 아현과 용산에 설치되었던 무동연희장은 개화기의 야외가설극장이었다. 아현무동연희장은 서울의 가면극인 애오개산대놀이를 비롯해 여러 잡희 종목들을 공연했을 것이다. 용산무동연희장의 연희 종목은 산대도감 연희와 대줄타기이다. 산대도감 연희는 중국 사신 영접이나 나례 때 설치했던 산대도감이 주관하던 연희인데, 가면극과 줄타기, 땅재주, 접시돌리기 등의 잡희를 포함하는 용어이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성시전도응령(城市全圖應令)〉은 한양의 모습을 그린 〈성시전도〉라는 그림을 보고 정조의 명(命)에 의해 지은 것이다. 이 시는 장사가 끝난 다음에 그곳에서 연희자들이 놀랍고도 괴이한 복색을 하고, 솟대타기·줄타기·인형극·원숭이 재주 부리기 등의 연희를 펼치는 것을 묘사했다. “사고팔기 끝나 연희 펼치기를 청하니”라는 내용을 통해 짐작할 때, 연희패가 상인들의 상업 활동과 연계하여 흥행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1899년 4월 아현과 1900년 3월 용산에 조성했던 무동연희장은 이런 전통을 계승하면서 시대의 변천에 적응해 설치한 야외가설극장이었다.
구한 말 근대적인 도시개조사업이 한창 진행 중에 있었던 한성부 안에는 연희장의 설치가 금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한성부 외곽에 해당하는 용산과 아현 등의 일부 한강변 지역에 한성부나 경무청의 허가와 통제 하에 무동연희장이 설치 운영되었다. 아현과 용산 무동연희장은 근대적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전차 정거장과 근접하여 한성부 도시민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무동연희장은 황성신문의 “日昨에 舞童을 始戲코져 얏더니 終日下雨야 演戱치 못고 陽曆三月五日로 改定야 每日 遊戱터이오니 諸君子 逐日 龍山으로 來玩시 舞童演戲塲 告白”(1900년 3월 7일자 기사)처럼 흥행을 위해 신문에 광고를 싣기도 했다 실내극장인 협률사의 공연 시간은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였다. 그러나 야외가설극장인 용산무동연희장은 황성신문 1900년 2월 28일자 광고에 ‘하오부터’, 3월 1일자 광고에 ‘금일 早朝븟터’라는 내용으로 볼 때, 오전이나 낮 동안에 주로 연행하고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 무동연희장은 야외무대라 조명 문제 때문에 야간 공연이 어려웠을 것이다. 애오개 즉 아현동은 구한말까지도 흥행을 위한 공연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의하면, 애오개에서 서강의 한잡배들이 아현 등지에서 무동 연희장을 배설했는데,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애오개에는 현방이 있었고, 바로 인접한 곳에 칠패시장이 있었으므로, 본래 상업 지역으로서 사람이 많이 몰렸던 곳이다. 이런 곳은 흥행을 위한 공연장소로 적격지였다.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Emile Bourdaret)의 En Corée(1904)에 수록된 아현무동연희장 사진을 보면, 너른 공터에 사각으로 넓게 말뚝을 박고 낮게 포장을 쳐서 울타리로 삼았다. 놀이판의 한가운데 높은 장대를 사각으로 세우고, 장대 끝에 커다란 그늘막을 설치했으며, 그늘막의 두 귀퉁이에는 각각 다른 색의 커다란 술을 매달았다. 이것은 무동연희장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놀이판 주위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있다. 놀이판 한가운데에서는 가면을 쓴 연희자들이 놀이를 하고 있고, 한쪽에 악사들도 보인다. 이 가면극은 애오개산대놀이일 가능성이 크다.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서울 가면극인 산대놀이의 연희자를 언급하면서, 아현(애오개)산대놀이가 유명하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아현무동연희장에서는 산대놀이 가면극을 비롯해 여러 연희 종목들을 연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899년 3월 9일자 “[警廳告示]“는 관왕 묘역 수리를 위해 의연금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무동연희를 허가해 달라는 요구를 엄금하고, 경무청에 단속을 지시하는 궁내부 훈령에 대한 기사이다.
실제로 제국신문의 “새문밧 동 근쳐 사들이 산두도감 연희쟝을 이려고 약간 제구지 만들엇스되 관부에 허가를 엇지 못야 쥬션즁이라더니 작일에 그 동리 사들이 룡산 줄타 구경을 갓더니 구경군은 희소고 맛 한셩판윤 리연씨가 룡산으로 나왓지라 산듸도감 허가여 주기 쳥구즉 리판윤 말이 룡산으로 나와 놀터이면 허가여 주마 고로 하로만 동셔 놀고 그후에부터 룡산셔 놀기로 쥰허가되여 방쟝 긔구 준비다더라.”(1900년 4월 9일자)라는 기사는 서대문 밖 냉동 근처 연희자들이 산대도감 연희장을 설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용산으로 가서 연희장을 꾸민 내용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용산무동연희장의 연희 종목은 산대도감 연희와 대줄타기이다. 산대도감 연희는 중국 사신 영접이나 나례 때 설치했던 산대도감이 주관하던 연희인데, 가면극과 줄타기, 땅재주, 접시돌리기 등의 잡희를 포함하는 용어이다.
무동연희장은 아현, 용산 등 경강(京江) 주변의 상업문화의 발달과 함께 설치되었고, 신문 광고를 통해 흥행을 도모할 정도로 기존의 전통연희 무동연희장은 아현, 용산 등 경강(京江) 주변의 상업문화의 발달과 함께 설치되었고, 신문 광고를 통해 흥행을 도모할 정도로 기존의 전통연희 놀이판과 다른 상업적 근대성을 갖고 있었다.이판과 다른 상업적 근대성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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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