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남자만으로 구성되어 풍물·버나·살판·어름·덧뵈기·덜미 등을 공연했던 조선 후기의 유랑예인집단
남사당패는 남자만으로 구성된 유랑연희집단으로서 꼭두쇠(우두머리)를 정점으로 풍물(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이)·덜미(인형극, 꼭두각시놀이) 등을 공연했다. 옛날에는 이 여섯 연희 외에 얼른(요술, 환술)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과 다소의 노자만 제공받게 되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남사당패는 조선 후기의 사당패(社堂牌), 거사패(居士牌), 굿중패와 더불어 재승(才僧) 계통 연희자들의 후예이다. 재승 계통의 연희자는 삼국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신라 원효의 무애희는 재승 계통 연희자에 의해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었다. 재승 계통 연희자는 고려가 불교 국가가 되면서 더욱 크게 활약했다. 『고려사』 고려 문종 10년(1056) 9월 조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속한 무리이면서도 장사를 하고 기생들과 뒤섞여 놀며, 속인의 복장을 하고 절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공연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불교에 이름을 올려놓고 승려 행세를 했지만, 실제로는 속인과 마찬가지였다. 조선조의 재승들은 사원에서 쫓겨나 호적도 없고, 부역도 하지 않으며, 조세도 부담하지 않는 유랑예인으로 전락했다. 조선 전기에는 이들을 사장(社長)이라 불렀는데, 조선 후기의 사당패·거사패·남사당패·굿중패 등은 사장과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남사당패, 걸립패, 중매구패 등의 유랑예인집단이 전국을 떠돌고 있었다. 이 중에서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남사당패가 한국을 대표하는 유랑예인집단이다.
조선 태종 6년 불교의 사사혁파정책(寺社革罷政策)으로 인해 사원이 혁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승려의 환속이 있었다. 그래서 본래 절에서 재를 올리는 일과 다비를 치르는 데 뽑혀 다녔고, 범패·염불·법고·바라 등 가무희에 뛰어난 명수들이었던 재승들은 그들끼리 어울려 살게 되었고, 사설사암은 이런 재승들의 활동 장소였다. 그러다가 같은 소질과 재주를 가지고 그늘에서 사는 신세인 무당 및 재인·광대와 어울리게 되면서 조선 전기에 연희 담당층의 하나로 성립되었으니, 그것이 사장(社長)이다.
『세조실록』14년 5월 4일 조에 ‘승인(僧人)의 사장(社長)’이 원각사의 불유를 모연한다고 일컫고, 혹은 낙산사를 짓는 화주승이라고 일컬으며 돌아다닌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사당패나 남사당패가 일정한 절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연희를 공연하고 다닌 것과 일치하고 있다. 이 사장으로부터 조선 후기의 유랑예인집단인 사당패, 남사당패, 굿중패 등이 파생되었다.
남사당패 등 유랑예인집단은 수입을 위해 경제력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그곳은 주로 장터·파시·마을 행사 등이었다. 경기도 안성 청룡사 근처에 남사당패의 근거지가 있었던 배경은 청룡사라는 절과의 관계뿐 아니라, 삼남의 물산이 집결되고 유통되던 안성 시장과의 관련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경남 하동 목골의 사당패도 쌍계사와 화개 장터를 연결시켜 이해해야 할 듯하다.
남사당패는 파시(波市)도 찾아가서 공연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파시는 어류 등을 거래하기 위해 바다에 서는 장이다. 파시가 서는 섬에는 수백 척의 배가 몰려들므로, 어부들이 묵는 임시 숙소가 만들어지고 수십 채의 음식점·주점 등이 들어서며, 창기와 작부들이 모여들어 큰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조창[漕倉, 조선 시대에 세곡(稅穀)의 수송과 보관을 위하여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창고]을 열려고 할 때와 포구들에 잡류가 찾아오는 것을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파(優婆, 사당)·창기(娼妓)·주파(酒婆)·화랑(花郞, 무당의 지아비인 광대)·악공(樂工)·뇌자(櫑子, 초라니)·마조(馬弔, 투전)·도사(屠肆, 소나 돼지의 도살) 등 팔반천류(八般賤流)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사당·광대·악공·초라니 등 유랑예인에 해당하는 연희자들을 거론한 것은 이들이 조창에서 곡식을 한양으로 보내기 위해 배들이 들고날 때와 포구들을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남사당패의 연희 종목 가운데 버나는 대접돌리기, 살판은 땅재주인 근두, 어름은 줄타기로서 전문적인 연희자들이 전승하던 종목들이다. 풍물은 악기 연주로서 수준 높은 농악을 연주했다. 또한 지금은 전승이 단절되었지만, 옛날에 있었다는 얼른은 환술로서 전문적 연희자의 연희 종목이다. 덧뵈기는 양주별산대놀이와 매우 유사한 내용으로서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을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덜미는 흔히 꼭두각시놀이라고 불리는데 한국의 유일한 전통 인형극이다.
사당패와 남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그래서 남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다. 사당패나 걸립패의 구성원에 승려나 보살이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고, 그들의 수입이 사종(四種, 阿彌陀를 생각하여 떼어 주는 공양물)이란 명목으로 사찰에 바쳐졌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시주질(施主秩)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이 중 건사(建寺)거리에 절을 짓는 내용이 있는 것은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공연 목적과 일치한다.
남사당패는 20세기 초반에는 만주 지방까지 활동 반경을 넓혀 순회할 정도로 위세가 있었다. 남사당패는 1930년대까지 전국을 유랑하면서 공연 활동을 해왔다. 이후 급속한 사회 상황 변화로 남사당패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54년 남사당패 일원이었던 남운용(南雲龍, 1907-1978)을 비롯한 일부 연희자들이 안성 농악대를 결성해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지만, 획기적인 상황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불기 시작한 전통문화 계승 운동은 옛 남사당패 연희자들에게 재기의 발판을 제공했다. 남운용은 과거에 함께 활동했던 연희자들을 모아 ‘인형극회 남사당’이라는 단체로 활동을 재개했고 1964년 꼭두각시놀음이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남사당은 예전 남사당패가 연행했던 여러 연희 종목들을 복원하고자 노력했고, 단체명도 ‘민속극회 남사당’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8년에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뿐만 아니라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가 국가무형문화재로 확대 지정되었다. 2009년에는 한국적 전통성과 총체적 놀이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리고 안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남사당패는 199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로 지정되었다.
남사당패는 가면극인 덧뵈기,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이뿐만 아니라, 줄타기·대접돌리기·땅재주 등 현대의 서커스에 해당하는 전통연희를 전승하고 있는 유일한 전문예인집단이다. 그들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치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풍물과 가면극 등 여러 연희와 민속에 영향을 주었다. 꼭두각시놀음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우리의 유일한 전통인형극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형극은 대개 유랑예인집단이 연행하던 놀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남사당패가 꼭두각시놀음을 전승해 왔던 것이다.
심우성, 「남사당패연구」, 동문선, 1989. 이경엽, 「도서지역의 민속연희와 남사당노래 연구」, 한국민속학 33, 한국민속학회, 2001. 전경욱, 「감로탱에 묘사된 전통연희와 유랑예인집단」, 공연문화연구 20, 한국공연문화학회, 2010.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