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 광대
조선 후기 전국을 유랑하며 삼현육각, 판소리, 잡가, 춤, 줄타기, 땅재주 등을 연행하던 유랑예인집단.
광대패는 주로 재인청 출신의 광대들이며, 마을과 장터를 떠돌며 판소리와 잡가, 춤, 연극적인 놀이가 가미된 줄타기, 춤 등의 공연을 펼쳤고, 춤과 놀이의 반주는 주로 삼현육각편상이 담당했다. 주로 경사 있는 집이나 장터를 찾아 놀이판을 벌였으며, 사전에 정해진 사례금을 받고 공연하였다. 재인청을 떠나 떠돌게 된 예인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되었으며, ‘뜬광대’라 불리기도 하였다.
광대패는 본래 재인청이라 불리는 관아 소속 예인 조직에서 유래하였다. 재인청은 무속 집안 출신의 무부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무악을 연주하는 화랑(화랭이), 곡예를 하는 재인, 가무 예능인인 광대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궁중 행사나 관아 의례에 동원되었으며, 신청(神廳), 악사청, 광대청, 화랑청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광대패가 집단을 이루어 유랑하게 된 배경에는 재인청 내부의 제도적 압박이 있었다. 조선 후기 들어 마을 수령과 서리들이 재인청 구성원에게 무세(巫稅)와 환곡을 과도하게 부과하면서, 많은 예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재인청을 떠나 유랑하게 된 예인들이 늘어났으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광대패라는 유랑예인집단이 형성되었다. 『신청완문』(1832)에는 “무세포를 사람마다 납세하도록 해 네 냥이 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를 감당해 낼 수 없어 직업을 잃고 떠도는 자가 열에 팔구가 되고…”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예인들의 유랑화가 제도적 억압에 따른 생존 전략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재인청에서 퇴임한 고령의 예인들도 광대패에 합류하였으며, 이들은 마을과 마을을 떠돌며 경사 있는 집을 찾아 놀이판을 벌이고 사례금을 받는 방식으로 공연을 이어갔다.
○ 조직과 운영 광대패는 재인청 소속의 대령광대와 재인청을 떠난 뜬광대로 구분된다. 대령광대는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며 재인청에 속해 있었고, 궁중 행사 및 관아 의례에 동원되었다. 뜬광대는 무세와 환곡 등 과중한 부담을 피해 재인청을 떠나 유랑하게 되었으며, 광대패를 구성하였다. 공연은 문희연, 회갑연 등 경사 있는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사전 합의된 사례금을 받고 진행되었다. ○ 활동내용 광대패는 삼현육각, 판소리, 민요창, 무용, 줄타기, 땅재주 등 다양한 전통 공연을 연행하였다. 공연 장소는 마을, 장터, 경사 있는 집, 축제 현장 등 다양하였으며, 즉흥성과 민중 참여를 특징으로 하였다. 공연은 사전에 정해진 사례금을 받고 이루어졌으며, 생계 유지의 수단이 되었다. 실제 사례로는 과거 급제자 축하 잔치인 문희연, 환갑잔치, 회혼례 등 사적 경사에 따른 공연이 대표적이며, 도당굿이나 각종 무굿과 같은 민속 의례에서도 연희를 펼쳤다. 경남 합천 초계 밤마리 시장에서는 대광대패라 불리는 유랑예인집단이 장날에 맞춰 장터를 떠돌며 풍물, 무동, 죽방울받기, 솟대타기, 오광대 가면극 등을 공연하였다. 이 지역은 낙동강변의 수로 요지로서 상인들의 비호 아래 유랑광대들이 모여들어 놀이판을 벌일 수 있었던 장소로 기록된다. ○ 역사적 변천 재인청의 쇠퇴와 함께 많은 예인들이 뜬광대로 전락하였으며, 광대패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광대패를 포함한 유랑예인들을 잡류로 규정하고 조창과 포구 출입을 금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광대패가 성색과 주육으로 세미 수납 관리나 뱃사람들을 유혹하여 부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대광대패 등 유사 집단도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장날에 맞춰 장터를 떠돌며 가면극, 풍물놀이, 솟대타기 등을 공연하였다. 경남 초계 밤마리 시장은 유랑광대들이 모여 공연을 펼치던 대표적인 장소로 알려져 있다.
광대패는 조선시대 재인청 출신 예인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유랑예인집단으로, 다양한 전통 공연 예술에 능한 연희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다른 유랑예인집단에 연희자를 공급하기도 하였으며, 예술적 기능과 연행 경험 면에서 두드러진 역량을 지닌 집단이었다. 광대패의 형성은 굿판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압박의 결과로, 제도적 억압을 피해 생존과 자율성을 모색한 예인들의 집단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조직운영과 활동은 예인들이 중심이 생존과 자율성, 민중 예술의 저항적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광대패의 활동은 후대의 마당극, 민속극, 국악 등 전통예술의 형성과 발전에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공연예술의 민속성과 공동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화사적 가치를 지닌다.
강용권, 『수영전통예능』, 수영고적민속보존회, 1993.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 1』, 한길사, 1995. 심우성, 『한국전통예술개론』, 동문선, 2001.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최상수, 『야류·오광대 가면극의 연구』, 성문각, 1984.
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