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중남녀재인(京中男女才人), 관나재인(觀儺才人)
조선시대 서울에 거주하며 중국 사신 영접이나 나례 등 국가 행사, 왕 또는 종친을 위한 연회나 행사에서 공연 활동을 했던 연희자.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 영접이 매우 중요한 국가 행사였고, 궁중에서는 나례(儺禮) 등 의례적인 절차나 제사의식, 그리고 진풍정(進豊呈) 등 임금과 대비, 종친 등이 즐기는 연회가 벌어졌다.
경중우인들은 평상시에 의금부의 관리를 받으며 이러한 국가 행사나 왕실 내부의 오락 유흥과 관련된 일에 복무했다. 이들은 관청의 노비, 종친이나 사대부의 사노(私奴), 외방재인 가운데서 발탁되는 경우가 있었다. 외방재인 출신의 경중우인들은 의금부 등의 관노로 예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에는 조선 전기부터 나례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국 사신 영접 행사나 나례가 있을 때 지방의 재인청에서 동원되던 재인들과 구별된다. 조선 전기의 여러 기록에 경중우인, 경중남녀재인 등의 용어가 보이고, 우인 또는 재인이 서울의 사대문 안에 살았다는 내용도 발견된다. 조선 전기에는 관나(觀儺)라는 소규모의 정기적인 공연이 궁궐에서 벌어졌다. 관나는 의금부가 경중우인, 즉 서울에 사는 연희자와 경기도의 재인들을 동원해 거행하는 소규모의 궁중 행사였다. 이때 참가한 재인을 관나재인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서울에 거주하던 연희자인 경중우인은 중앙관청인 의금부의 관리를 받았다. 의금부는 군사적인 성격을 갖는 순작(巡綽, 순찰하여 경계함)ㆍ포도(捕盜, 도둑을 잡음)ㆍ금란(禁亂, 법을 어기거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금지함), 그리고 사법기관으로서 왕권에 도전하거나 질서를 유린하는 범인의 체포ㆍ구금ㆍ심문ㆍ판결을 담당했다. 또한 궁정의 행사와 관련하여 연희자들을 동원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평상시에 경중우인을 관리하며 왕실의 공연 문화를 주관한 의금부가 좌변나례도감의 일을 맡고, 화산대(火山臺) 등의 볼거리를 연출하는 군기시가 우변나례도감의 일을 맡았다. 나례도감이 좌우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임금의 행차 등이 지나는 좌우 양쪽에서 나례(공연)를 벌였고, 중국 사신 영접시 광화문 밖에 산대를 좌우에 각각 하나씩 설치했으며, 연희자들도 각각 독자적으로 동원해 공연을 펼쳤기 때문이다.
지방의 재인들이 서울의 4대문 밖에 모여 사는 것도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시기에, 서울의 성문 안에 경중우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연희자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이들이 상당한 특권을 누렸음을 의미한다. 『대전회통(大典會通)』 형전(刑典) 금제(禁制)의 “화랑(花郞)ㆍ유녀(遊女)나 무녀(巫女)가 성중(城中)에 머물러 있으면 벌을 받는다[화랑·유녀를 적발했을 때 양가(良家)의 자녀이면 영구히 잔읍(殘邑)의 노비로 소속시키고, 공사천(公私賤)이면 장 100대에 3,000리 밖으로 유배 보낸다. 성중에 있는 무녀는 모두 색출하여야 하며 검거하지 못하는 관원은 파면한다]”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의 성문 안에는 화랑ㆍ유녀ㆍ무녀가 머물러 거주할 수 없었다. 여기서 화랑은 흔히 세습무당 집안의 남자들로서 악기를 연주하고 여러 가지 연희를 공연하는 연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거주하는 연희자들은 단지 연희만 전업으로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일도 병행했기 때문에 서울에 살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종실의 하인인 귀석, 야장(冶匠, 대장장이)으로서 궁시장(弓矢匠, 활을 만드는 장인)으로 구해 왔던 고룡처럼 종친이나 사대부의 사노(私奴), 관청의 노비, 외방 재인 중 발탁된 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경중우인의 일부로 주목되는 것이 성균관의 노비인 반인(泮人)이다.
지난달 20일경 반인의 무리가 마침 북방사신들을 위해 베풀었던 산붕놀이를 멈추는 때를 만나, 각자 돈을 모아 산붕희(山棚戱)의 도구를 빌려 이틀간 성묘(문묘)의 뒤에 산붕을 설치하고 기이한 재주를 두루 보여 주었고, 음란한 악을 크게 베풀었는데 성균관의 유생들도 뛰어가서 구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권45 영조 12년 2월 20일 조, 영조 12년 병진년(丙辰年, 1736)에 임금이 유사에게 성균관 입직관(入直官)의 죄를 다스리고, 태학의 두 장의(掌議)를 모두 과거의 응시자격을 정지시키라고 명했다. 이때 반인들이 산붕(山棚)을 설치해 반촌 내에서 연희를 베푸니 임금이 듣고 이 명령이 있었다. 『태학지(太學志)』(1785년) 권 제7 「교화(敎化)」에 의하면, 성균관 노비인 반인들이 성균관 근처에서 산붕을 설치하고 연희를 베풀었다.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는 반인들이 산대도감 또는 나례도감에 예속되어 있었고,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 동원되었으며, 애오개산대놀이의 연희자였다고 지적했다. 북한학자 김일출(金日出)은 “이것은 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산대놀이의 연기자가 반인(泮人)이라고 불리운 하층 인민이었던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 반인은 물론 봉건사회에 있어서 인민의 개념 안에 포괄될 피지배 계급의 일부였으나, 그들이 공연하는 산대놀이는 벌써 어느 정도로 전업화(專業化)한 것이었다. 또 그것은 특히 서울을 위시한 도시의 하층 주민들을 상대로 공연되었던 것이다.”라고 하며, 서울 본산대놀이의 연희자를 반인이라고 지적했다.
구한말 국악인이자 관리로 활동한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은 송석하와의 대담에서 서울 본산대놀이 연희자를 편놈이라고 밝혔다. 김동욱과 이두현은 송석하가 말한 편놈을 반인으로 간주한다. 김동욱은 “보통 반인(泮人)은 편놈 또는 관(館)사람이라 하여 소위 재인백정(才人白丁)의 신분에 해당하여 궁중의 잡희(雜戱)나 산대희(山臺戱) 때에는 우인(優人)으로 출연하곤 했다.”라고 지적했다. 이두현은 인조(仁祖) 이후 공의(公儀)로서의 나희(儺戱)가 급격히 쇠퇴하고, 영ㆍ정조 이후 나희가 국가적인 행사로는 폐지되자 그 놀이꾼인 반예(泮隸, 편놈)들이 민간에서 가면극인 산대놀이를 시작했고고 하며, 반인을 경중우인으로 보았다.
서울에 거주하며 궁정의 오락에 복무하던 경중우인은 인조대 부묘(祔廟) 후에 행하는 공연이 폐지되고,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공연 역시 정조 8년(1784)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자, 점차 민간에서 공연 활동을 펼쳤다. 조선 후기 서울 지역 연희자들의 흥행 활동에 영향을 준 관청은 좌우포도청과 용호영이었다. 경중우인은 포도청과 용호영 등 나례를 담당하던 관청과 여러 이해관계로 밀착되어 있었다. 포도청의 문졸(門卒, 혹은 사령, 일수, 나장)은 연희자(재인)로 보충되었고, 포도군관은 기녀의 기부(妓夫)인 경우가 많았으며, 진연이나 진찬 때 여령(女伶)을 동원할 때 좌우포도청에서 서울 시내의 주상(酒商)과 유녀(遊女)를 대령하는 역할을 맡았다. 용호영의 군악 중 세악(細樂, 삼현육각)은 민간 연희의 반주 음악에 쓰였으므로, 용호영의 세악수들은 연희자 및 기생과 교류할 기회가 많았다.
지방의 연희자(재인)들이 서울의 사대문 밖에 모여 사는 것도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시기에, 연희자가 서울에 살았다는 것은 상당한 특권이다. 경중우인들은 의금부ㆍ포도청ㆍ용호영 등과 친연 관계를 유지하면서 원만한 공연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경중우인 가운데 성균관 반인들에 의해 서울의 가면극인 본산대놀이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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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