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을 크기별로 구분할 때 큰 것(대고)과 작은 것(소고)의 중간 크기 북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 또는 조선시대 궁중의 제례 및 군례에 사용된 북의 일종
북의 제작 방식이나 전반적인 형태가 같고 크기만 다를 때 크기에 따라 대고·중고·소고로 구분하는 관행이 있다. 이때 중고는 큰 것과 작은 것의 중간 크기 북을 이르는 일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밖에 조선시대 궁중 제례 및 군례에 특별히 중고라는 명칭으로 북을 사용한 예가 있고,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악기도록에는 조선시대 문헌에 도설된 것과 형태가 다른 중고가 제시되어 있다. 두 가지 유형의 중고가 용도에 따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고의 명칭과 용도가 확인되는 최초 기록은 『악학궤범』의 군기(軍旗)에 제사하는 둑제(纛祭) 항목이다. 초입배열도와 회선도, 진퇴도 및 해설에 중고의 배치와 쓰임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중고는 1781(정조5)년에 새롭게 제정된 관왕묘 제례에도 편성되었다. 관왕묘 제례악은 <정대업지곡>의 일부를 발췌하여 사용하였지만 악기 및 기물의 편성, 주악인의 복식은 종묘제례와 달랐다.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악공들이 다섯 방위에 기를 세우고 피리, 대금, 해금, 장구 외에 태평소와 대금(大金)과 소금(小金)과 함께 중고를 치며 악장을 불렀다. 한편, 『춘관통고(春官通考)』(1788년경) ‘정대업지무의물도’ 소고 편에 ‘소고는 지금 쓰지 않는다. 중고를 사용하는데 둑제의 것과 같다’는 설명과 함께 그림이 실려 있어 그 모양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정조실록』, 『순조실록』 등의 기사에 중고가 군기(軍器)의 일종으로 중앙과 각 지방의 군대에 비치되었음이 언급되어 있다.
20세기 이후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사진집류에는 교방고처럼 틀 위에 놓고 치는 북이 실려 있다. 사진 속의 중고는 현재 전하지 않으며, 재현 제작한 중고가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아악기사진첩 (건)』 (1935) 및 『두산백과사전』에서는 이 북을 청에서 온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근거를 찾기 어렵다.
조선시대 둑제에 사용된 중고의 모양은 조선후기의 『춘관통고(春官通考)』(1788년경) ‘정대업지무의물도’ 소고 편에 ‘소고는 지금 쓰지 않는다. 중고를 사용하는데 둑제의 것과 같다’는 설명과 함께 그림이 실려 있다. 그 모양은 『악학궤범』 소재 대고 및 소고와 같이 북통에 박힌 고리에 끈을 달아 메고 치는 형태이다. 북통에는 모란문양이, 북면에는 태극문이 그려져 있고, 가죽은 광두정을 한줄로 박아 고정시켰다. 중고의 규격은 분명치 않으나, 『악학궤범』에 기술된 소고(북면: 16.94cm. 북통 너비 12.32cm) 보다 큰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 이왕직아악부 소장 중고는 북틀 위에 올려 놓고 교방고처럼 연주하는 형태로, 『조선아악기사진첩 (건)』의 해설에 따르면 중고의 북면의 지름은 2척 5치(75.7cm), 북통 길이는 2척 2치 5푼(63cm), 북통 둘레는 8척 8치(266cm), 받침대의 높이는 3척 6치 5푼(110cm), 너비는 3척 4치 5푼(104.5cm)이다.
『악학궤범』 <정대업정재의물도설>에는 어깨에 메고 치는 대고와 소고만 도설되어 있으나, 둑제 및 관왕묘제례에 중고가 편성된 점으로 미루어 같은 형태의 북이 대·중·소로 제작되어 용도에 맞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군영에도 중고가 비치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 북은 궁중악무 외에 주로 군례 및 관련 제례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20세기 전반기까지 이왕직아악부에 소장되었던 교방고 형태의 중고는 틀 위에 고정시켜 놓고 치는 형태로 동명의 중고 유형이 두 가지였음을 보여준다.
『악학궤범』, 『춘관통고』, 『정조실록』, 『순조실록』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학술총서 10) 조선아악기사진첩 건, 조선아악기해설 사진집, 이왕가악기』 , 국립국악원, 2014.
송혜진(宋惠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