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성 요소 및 원리
문희연은 조선조부터 보편적으로 열린 잔치로서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의 방방(放榜: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증서(證書)를 주던 일) 뒤, 3일 동안 유가(遊街: 급제자의 시가 행진)하고 문희연을 베푸는 것이 상례였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문희연이 행하여졌으나, 문무과의 삼일유가(三日遊街)와 문희연이 잠시 금지되기도 하였다. 때때로 문희연을 사치스럽게 행하거나 기녀들을 불러 가무를 즐기는 것이 지나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문희연의 잔치 규모와 가무를 즐기는 정도는 개인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엄청난 흉년을 당한 때에 삼일유가는 그만두지 않더라고 창기(唱妓)에게 풍악을 연주하게 하고 문희연을 베푸는 일은 삼가하기도 하였다. 문희연이 조선조에 속적한 것은 손님들을 초청하여 계적(桂籍: 과거 급제자의 명부(名簿))을 펼쳐 놓고 연희를 벌이며 나이 든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일을 미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판소리가 문희연에서 연행되기도 하였는데,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에는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과거에 합격하면 반드시 광대를 불러 노래와 재주를 벌인다.”라는 내용이 있고,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가 유가를 하고는 광대에게 줄 돈이 없어 붉은 부채에 시를 한 수 써서 주었다는 등의 이야기 등을 보면, 18세기 이후 문희연을 비롯한 유가, 홍패고사, 은영연 등의 과거 급제자 행사에서 판소리가 불리고, 광대에 의한 공연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문희연 자체에 대한 회화 자료는 거의 없고, 은영연을 행하기 전에 있었던 삼일유가를 기록한 그림과 은영연이 남아 있다. 삼일유가는 급제가의 영광을 만방에 알리는 행사로서 개인별로 실시하였다. 유득공의 『경도잡지』에는 급제자의 유가에 세악수와 광대, 재인을 거느리고 유가를 한다고 하였는데, 관련 그림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광대가 선두에서 길놀이를 하듯 공연을 하고, 세악수가 행악을 연주하는 모습과 재인의 공연까지 보인다.
문희연이 과거에 급제한 집에서 친척가ㆍ친지를 불러 행하는 잔치였던 것과 달리 은영연(恩榮宴)은 임금이 급제자에게 베푸는 연회로서 급제자를 선발한 시관(試官)들을 초대하였다. 임금은 연회에 필요한 악사, 기녀, 재인 등을 보내고 술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과거은영연도〉는 1580년(선조 13) 알성시(謁聖試: 부정기적으로 실시한 시험)의 급제자에게 국왕이 내린 은영연의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은영연의 거행 장소는 의정부 청사로 임금은 참석하지 않았고 영의정을 잔치를 주관하는 압연관(押宴官)으로, 호조ㆍ예조ㆍ병조판서를 부연관(赴宴官)으로 하여 진행하였다. 당상(堂上)에 압연관, 부연관, 문무 시험관 등이 앉고, 당상에 이르는 동쪽에 문과 급제자, 서쪽에 무과 급제자가 앉는다. 〈과거은영연도〉에는 은영연에서 펼쳐진 기녀들의 춤, 악공의 연주, 재인의 연희가 잘 묘사되어 있다. 대청 안에는 기녀가 춤을 추고 있고, 대청 아래에는 기녀들의 대기석과 악공들의 연주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문과 급제자(12명)와 무과 급제자(39명)의 자리 중간에 월대와 연결된 널마루에서 재인들에 의한 연희가 진행되는 모습도 잘 나타나 있다.
임미선(林美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