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항사(築港舍), 애관(愛舘/愛館)
1890년대 중후반 인천 지역에 설립된 국내 최초의 실내극장
인천협률사는 1890년대 중후반 설립된 실내극장으로 개관 당시의 주요 공연물은 전통연희였다. 1911년경 축항사로 개칭한 이후에는 신파극을 주로 공연하였으며 1920년대 애관으로 극장 명칭을 변경하면서 영화상설관으로 변모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협률사의 설립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있기 이전까지 국내 최초의 실내극장은 1902년 경성에 설립한 관영 실내극장 협률사(協律社)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인천협률사는 경성의 협률사보다 이른 1890년대 중후반에 설립된 것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인천협률사는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개설된 실내극장이라 하겠다.
○ 역사적 변천 과정
인천협률사는 1890년대 중후반에 부산 출신 이주 상인이었던 조선인 갑부 정치국(丁致國, 1865~1924)이 인천부(仁川府) 경정(京町) 238번지에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개조해서 개관한 실내극장이었다.
개항장 인천에 조선인이 최초로 설립한 인천협률사의 개관 초기에는 남사당패, 굿중패의 민속가요와 연예, 인형극인 박첨지와 흥부놀부, 광대들의 땅재주, 줄타기, 무등타기, 승무, 성주푸리 등 다양한 전통연희를 중심으로 공연레퍼토리를 구성해 운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경 협률사는 축항사로 이름을 개칭하면서 일부 극장 시설이 개보수 되었다. 이에 따라 축항사는 2층 건물에 정원수가 대략 500명이 수용될 수 있는 극장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축항사는 1년에 공연일수가 50~60일에 불과해 결손을 보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극장운영은 순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축항사는 당시 구극(舊劇)·구연극(舊演劇)·구파연극(舊派演劇)으로 불리던 전통연희를 공연하기도 했지만 1910년대가 신파극(新派劇)의 전성기였던 만큼 처음 신파극단을 창설한 임성구(林聖九, 1887~1921)가 이끄는 혁신단(革新團)을 중심으로 취성좌(聚星座), 신극좌(新劇座) 등의 공연을 지속적으로 기획해 주로 신파극을 무대에 올려 흥행했다.
1920년대 접어들면서 축항사의 경영권이 김윤복(金允福, ?~?)에게 인수되면서 극장명은 애관으로 변경되었다. 애관은 신파극으로 흥행했던 축항사와는 달리 1923년 활동사진관으로 변모하게 된다.
1928년 애관은 조선의 유지들이 외국 영화 수입을 위해 만든 영화배급소였던 기신양행이 소유권을 갖게 되어 외국영화를 직접 공급할 수 있게 되면서 1929년부터 영화상영관으로 본격 운영되기 시작했다. 애관은 영화 상영이 주목적이었으나 당시 흥행하던 민속음악공연인 명창대회가 열리기도 했으며 중앙극단이 증가한 만큼이나 연극도 자주 무대에 올렸다. 이밖에도 애관은 문화 행사와 대규모 집회 그리고 지역 자치 행사를 개최하는 인천의 다목적 공간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애관은 한국전쟁 기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후 증개축하여 재개관하였으며 2004년 5개의 상영관을 갖춘 860석 규모에 이르는 복합관으로 변신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0년대 중후반에 설립된 실내극장 인천협률사는 개항 이래 근대에서 현대를 관통하는 긴 시간 동안 인천지역의 거점극장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설립 초기 단층 창고에서 시작한 인천협률사는 이후 시설의 개선과 더불어 축항사에서 애관으로 극장명을 변경해 가면서 시대의 흐름에 적극 대응했다. 물론 시기별 극장이 추구하는 운영에 변화는 있었으나 인천협률사는 대중들이 요구하는 당대의 문화를 적극 반영해 운영하면서 인천 지역 주민들의 공연 문화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인천의 문화산업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지역 극장으로 기능해 왔다고 하겠다.
김남석, 「인천 애관(愛館) 연구-‘협률사’설립에서 1945년 광복까지-」, 인천학연구 17, 2012. 김호연, 「한국 근대공연예술 성립의 한 양상=仁川을 중심으로」, 인천학연구 3, 2004. 이희환, 「인천 근대연극사 연구(1883~1950)」, 인천학연구 5, 2006. 「혁신단의 자선연주회」, 매일신보, 1914. 3. 13. 「면목일신한 인천애관낙성」, 조선일보, 1927. 10. 4.
김민수(金珉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