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중반에 등장한 민속음악공연
명창대회는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해 대중들의 인기 속에 대략 1960년대 초까지 지속된 대표적인 민속음악공연으로 초기에는 연주회 형식으로 개최되었으며 이후 경연식 대회가 추가되어 열리기도 했다.
명창대회의 출현은 1920년대 전반기 판소리명창들의 음반취입이 본격화되면서 음반의 선전을 위해 개최했던 축음기회사의 공연에서 비롯되었다.
명창대회는 음반홍보를 위한 축음기회사의 연주회가 흥행함에 따라 공연의 주요출연자였던 판소리명창들이 1926년 이와 유사한 공연을 직접 주최하면서 자신들을 상징하는‘명창’이란 용어를 공연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등장하였다.
○ 역사적 변천 과정 1926년 11월 판소리명창들은 광무대에서 첫 명창대회를 개최했으며 1927년에는 경성을 중심으로 성황리에 세 차례의 명창대회가 추가로 열렸다.
당시 전통음악공연은 음반회사가 주최하는‘시연회’와‘축음기대회’를 비롯해‘조선고악연주대회(朝鮮古樂演奏大會)’,‘조선음악대회(朝鮮音樂大會)’등 다양한 공연명칭으로 개최되고 있었다. 하지만 명창대회는 1920년대 후반 경성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지방의 각종 단체들과 신문사, 경성방송국 등의 대중매체가 민속음악 관련공연을 기획할 때 명창대회를 공연명으로 우선적으로 사용하면서 전국에 걸쳐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명창대회는 주요공연물인 판소리 이외에도 다양한 주최자의 기획 의도에 따라 여러 민속음악이 추가되고 때로는 정악, 가곡, 서양음악 등이 함께 연주되면서 공연종목에 조금씩 변화가 나타났다. 이처럼 경성에서의 공연 이후 지방까지 확산된 명창대회는 더 이상‘명창’들만을 위한 공연이 아닌 다양한 연주가 어우러진 형태의 민속음악공연으로 거듭나게 된다.
1930년대는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가 설립되었고 이후 후신단체로 조선 최대의 민속음악단체인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가 결성되었다. 단체는 명창대회의 시작을 주도했던 판소리명창들이 소속되어 있었던 만큼 다양한 형식의 명창대회를 자주 개최했다. 특히 당시까지 공연된 적이 없었던 여성명창대회를 기획해 대중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또한 신문사는 1920년대에 이어 1930년대에도 독자위안공연이란 제목으로 신문독자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써 명창대회를 다수 주최하고 때로는 다방면에서 후원하면서 명창대회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1920년대 후반에 지방으로 확산되었던 명창대회는 1930년대 접어들어 경성뿐 아니라 원산⋅당진⋅하동⋅대구⋅경주⋅포항⋅전주⋅순천 등 전국에 걸쳐 그 공연범위가 더욱 확장된다. 이에 따라 공연의 주최자가 더욱 다양해지면서 자선명창대회, 낙성식 축하 명창대회 등 주최자의 목적에 따른 여러 형태의 명창대회가 개최되면서 1930년대 명창대회는 대중들의 인기를 끄는 민속음악공연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특히 1930년대에는 연주회 형식으로 공연되었던 명창대회에 경쟁을 통한 입상자에게 상금의 명목으로 음반취입을 내걸고 때로는 순위를 매겨 차등적으로 상금을 지급하는 형태의 경연방식이 새롭게 유입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의 명창대회가 주로 판소리명창들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다면 1930년대에는 이들과 더불어 음반취입의 증가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던 권번의 기생들이 명창대회의 주요 출연자로 부상했다. 판소리명창들과 함께 명창대회에 출연한 기생들은 주로 경서도 잡가⋅민요⋅전통춤 등의 전통가무를 중심으로 때로는 신민요와 유행가 등을 선보이며 흥행했다.
1930년대 명창대회가 전국에 걸쳐 흥행 공연물로 유행하면서 민속음악공연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말이었던 1940년대 전반기에는 일제가 중일 전쟁을 계기로 조선사회에 전시 체제를 구축하고 모든 문화 분야를 일괄 통제하면서 다수의 민속악인들이 포진해있던 조선성악연구회를 비롯한 공연단체들의 자율적인 활동이 전면 차단되었다. 게다가 일제는 한국어와 한글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이전까지 명창대회의 주요 후원자로 역할 해왔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키는 등의 영향으로 명창대회는 급격히 쇠퇴하였다.
제하의 활동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따른 민족음악의 수립이라는 기치 아래 민속악인들
1945년 광복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강제된 모든 규제가 사라지면서 일은 조선성악연구회의 뒤를 이은 국악원(國樂院)을 새롭게 결성하고 공연활동을 재개하였다. 더불어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복간되고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명창대회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전국민속예술대회(全國民俗藝術大會), 국악대제전(國樂大祭典) 등 시대의 변화에 따른 또 다른 전통음악공연들이 등장하면서 명창대회는 광복을 기점으로 여타의 새로운 공연들로 점차 대체되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1960년대까지 간헐적으로 공연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20년대 등장한 명창대회는 일제강점기의 참담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속음악을 통한 동질의 민족 정서를 폭넓게 향유하고 위안 받을 수 있는 대표적인 민속음악공연으로 자리매김하며 1930년대를 민속음악의 전성기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고 하겠다.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김민수, 「초기 명창대회에 관한 일고찰-1920년대 중·후반을 중심으로-」, 한국음악연구 59, 2016. 김민수, 「1930년대 민속악의 공연양상-명창대회를 중심으로」, 동양음악 41, 2017.
김민수(金珉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