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습놀이(大私習놀이), 통인청대사습(通引廳大私習), 전주대사습놀이(全州大私習놀이)
전라북도(全羅北道) 전주(全州)에서 개최되어 온 국악경연대회(國樂競演大會)
대사습은 대사습놀이 또는 통인청대사습으로도 지칭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성행하다가 중단된 민속대회로 1975년 전주대사습놀이로 부활해 현재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는 판소리 중심의 국악경연대회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 숙종대(재위, 1674~1720)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사습은 말을 타고 활을 쏘던 대회에서 기원했다. 조선후기에는 다양한 놀이와 판소리 등이 함께 공연되었으며 오랜 기간 중단되었다가 1975년 전북 전주 지역에서 전주대사습놀이로 복원되어 그 명목이 유지되고 있다.
○ 역사적 변천 과정
대사습의 연원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조선 숙종대의 말 타고 활 쏘는 마상궁술대회(馬上弓術大會)와 영조대(재위, 1724~1776)의 통인 물놀이 그리고 철종(재위, 1849~1864) 후기의 판소리 백일장 등 민속무예(民俗武藝)놀이를 종합한 것을 지칭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간주되고 있다. 한편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의 정창업(丁昌業, 1849-1919)과 유공렬(柳公烈, 1864~1930) 편에 기록된 대사습 관련 내용은 적어도 19세기에 대사습이 대중들의 호응 속에 개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애초에 개최된 대사습의 경연종목과 관련한 설은 크게 두 가지로 첫째는 숙종대의 마상궁술대회, 영조대의 통인 물놀이, 철종 후기의 판소리 백일장 등 민속무예를 종합한 형태였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무예놀이와 별개로 순수한 판소리만의 축제로 열렸다는 시각이다. 어쨌든 두 주장을 통해 파악되는 사실은 대사습의 주요 종목이 판소리였다는 공통점이다.
조선말까지 전라감영(全羅監營)과 전주부의 통인청(通引廳)이 주관했던 대사습은 매년 동지달에 지금의 시청에 해당하는 본부통인(本府通引)과 도청에 해당하는 영문통인(營門通引)이 양측으로 나뉘어 뛰어난 판소리명창들을 경쟁적으로 초청해 경연을 펼쳐 관중의 많고 적음으로 우열을 가리는 행사였다. 이때의 대사습은 지금의 경연대회 형식이 아닌 순수한 축제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두 통인청 간의 경쟁에 따른 과열로 인해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창극사』의 기록에 따르면 유공렬은 30세에 대사습에 참가해 마침내 명성을 얻은 반면 정창업은 대사습 경연 중 판소리사설의 같은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해 퇴장당한 후 수년간 소리를 중지하고 근신했다고 한다. 이처럼 대사습은 조선후기 명창임을 판가름하는 등용문으로서 명창의 반열에 오른 이후에는 중앙에 진출해 경제적 부도 축적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어전명창으로서 벼슬을 제수 받아 국창서열에 오르는 영광을 누릴 수도 있었다.
이 시기 대사습에 참가해 명성을 얻은 것으로 파악되는 당대 명창들은 장자백(張子伯, ?-?), 정창업, 김세종(金世宗, ?~?), 송만갑(宋萬甲, 1865-1939), 염덕준(廉德俊, ?~?), 이날치(李捺致, 1820-1892), 박만순(朴萬順, ?-?), 주덕기(朱德基, ?~?), 장수철(張壽喆, ?~?), 유공렬, 배희근(裵喜根, ?~?), 김창환(金昌煥, 1855~1937), 김정근(金定根, ?~?) 등이었다.
조선후기에 성행했던 대사습은 대략 1900년대까지 존속하였으나 한일병탄 무렵에 단절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전통예술에 뜻있는 전주의 유지들이 모여 1974년 전주대사습놀이 부활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의 주관으로 그간 중단되었던 대사습은 1975년 전주대사습놀이란 명칭으로 부활하였으며 조선후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판소리를 주요종목으로 대회를 운영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는 판소리, 농악, 무용, 시조, 궁도 이상 5개 부문의 경연으로 열렸으며 최고의 영예인 판소리 장원에 대통령상이 수여되었다. 추석 무렵에 열렸던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는 제2회부터 시기를 변경해 단오날 개최되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문화방송의 경제적 지원으로 기악, 민요, 판소리 일반부, 가야금병창 종목이 경연에 포함되었으며 이때부터 TV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기 시작했다. 2010년에 명고수부가 추가로 신설되면서 현재 전주대사습놀이는 10개 부문의 경연으로 개최되고 있다. 1983년에는 판소리, 농악, 기악, 무용 이상의 4개 부문으로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전국대회가 시작되었다. 이후 민요, 가야금병창, 고법, 판소리 초등부, 시조 초등부 이상 5개의 종목이 추가되면서 현재는 9개 부문으로 대회가 열리고 있다.
조선 중후반에 성행한 대사습의 전통을 이어받은 오늘날의 전주대사습놀이는 국악이 대중에게 외면 받던 시기에 부활해 장기간 개최되면서 가장 권위 있는 국악인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하며 매년 경연을 통해 실력 있는 명창, 명인들을 꾸준히 배출해 왔다. 이를 통해 민속음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을 뿐 아니라 국악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제고하고 국악의 위상을 재정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온 국악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대회라 하겠다.
김기형, 「판소리경연대회와 축제」, 구비문학연구 24, 2007. 전주대사습사 편찬위원회, 『전주대사습사』,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1992. 정노식, 『조선창극사』, 동문선, 1994. 최동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와 판소리 경제생태계의 구조」, 『남도민속연구 39』, 2019. 홍현식, 「남도의 민속 풍류-「대사습」 답사를 중심으로-」, 문화재 8, 1974. 황미연, 「전주대사습놀이의 諸問題에 대한 硏究」, 낭만음악 7/4(통권 28호), 1995 가을호. 「전국 대사습놀이 전주서 9월 22일」, 『경향신문』, 1975. 8. 23. 「학생대사습놀이 MBC 1일부터」, 『동아일보』, 1983. 11. 19.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www.jjdss.or.kr)
김민수(金珉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