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극협단(國劇協團)
광복 이후 창단한 국악원(國樂院) 산하의 창극단체(唱劇團體).
국극협회는 1945년 12월경 국악원 산하에 결성된 창극단체로 1948년 2월 17일 첫 창립 기념 공연을 개최했으며 이후 단체명을 국극협단으로 변경해 활동하였다.
국극협회는 광복 직후 민속악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국악원 산하의 창극단이었던 국극사(國劇社) 단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또 다른 창극단체였다. 국극협회는 창립 기념 공연 얼마 후에 국극사의 단원을 대부분 제외하고 새로운 인물로 재구성해 국극협단이란 단체명으로 다시 창립 공연을 개최하고 활동하게 된다.
○ 역사적 변천 과정
광복 직후 민속악인들은 민족음악의 수립이라는 사명감으로 주체적인 활동을 위해 국악원을 결성했다. 국악원은 결성과 함께 첫 사업으로 1945년 11월경 창극단 국극사를 창단하고 창극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1945년 12월 무렵에는 국극사 단원을 중심으로 별개의 창극단체인 국극협회를 새로이 조직하였고 1948년 2월 17일부터 국도극장에서 첫 창립 기념 공연인 《대심청전》을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은 1947년 3월부터 국악원의 기획으로 시작된 창극제전 중 ‘제5회 창극제전 겸 국극협회 창립 기념 공연’이란 타이틀로 개최되었다.
국극협회의 첫 공연이었던 창극 《대심청전》은 김아부(金亞夫, ?~?)가 각색하고 조상선(趙相鮮, 1909~1983)이 연출했다. 출연진은 오태석(吳太石, 1895~1953)ㆍ정남희(丁南希, 1905~1984)ㆍ조상선ㆍ강장원(姜章沅, 1909~1962)ㆍ김재선(金在先, 1900~?)ㆍ성순종(成淳種, ?~?)ㆍ서정길(徐貞吉, ?~?)ㆍ장영찬(張永璨, 1930~1976)ㆍ김윤덕(金允德, 1918~1978)ㆍ조영만(趙永萬, ?~?)ㆍ임유앵(林柳鶯, 1913~1964)ㆍ박귀희(朴貴嬉, 1921~1993)ㆍ조순애(曺順愛, ?~?)ㆍ안채봉(安彩鳳, 1920~1999)ㆍ조미연(趙美姸, ?~?)ㆍ박도아(朴桃娥, ?~?)ㆍ조복난(趙福蘭, ?~?)ㆍ이상금(李相今, ?~?)ㆍ오봉(吳鳳, ?~?)ㆍ박영자(朴英子, ?~?)ㆍ박녹주(朴綠珠, 1906~1979)ㆍ성남숙(成南淑, ?~?) 등이었다. 이 공연은 두 단체의 합동공연으로 소개되었지만 사실상 출연진 중 한 명을 제외한 단원 모두 국극사 겸 국극협회의 단원이었다.
국극협회는 창립 기념 공연 얼마 후에 단체명을 국극협단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1948년 5월 23일부터 7일간 국악원 주최로 시공관에서 일제강점기말 동일 창극단이 공연했던 창극 《일목장군(一目將軍)》을 예제만 변경해 창극 《고구려(高句麗)의 혼(魂)》이란 작품으로 다시 창립 공연을 개최했다. 이 작품은 김아부가 각색하고 박동실(朴東實, 1897~1968)이 작곡했으며 주인공은 박후성朴厚性, 1921~?)과 김소희(金素姬, 1917~1995)가 맡았다.
단체명을 변경해 재창단한 국극협단의 구성원은 박동실·박후성·한갑득(韓甲得, 1919~1987)·서정길(徐正吉, ?~?)·김운칠(金雲七, ?~?)·김영동(金英同, ?~?)·천세원(千世元, ?~?)·공기준(孔基俊, ?~?)·신봉학(申鳳鶴, ?~?)·김원석(金元石, ?~?)·김동준(金東俊, ?~1990)·주광득(朱光得, ?~?)·김득수(金得洙, 1917~1990)·김소희·공기남(孔基男, 1917~1971)·김봉선(金鳳仙, 1899~?)·박초향(朴初香, ?~?)·박희숙(朴姬淑, ?~?)·김경애(金敬愛, 1928~?)·김국희(金菊姬, ?~?)·김진숙(金眞淑, ?~?)·김해선(金海仙, ?~?)·박정숙(朴貞淑, ?~?)·박홍도(朴紅桃, ?~?)·박농선(朴弄仙, ?~?)·양옥진(梁玉珍, ?~?) 등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국극협단은 단체명의 변경과 더불어 국극협회 시절 국극사 소속으로 활동했던 김소희를 제외하고 단원을 대부분 새롭게 재구성해 결성한 창극단이었다.
국극협단은 1948년 5월의 공연에 이어 1948년 6월 10일부터 3일간 영보극장에서 열린 공연에서도 여전히 창립 공연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창극 《고구려의 혼》을 다시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 이후 국극협단은 지방 공연 위주의 활동을 전개한다. 1949년 1월에는 대구와 포항에서 단국창극단(檀國唱劇團)과 함께 합동 신춘 공연이란 제목으로 《춘향전》·《심청전》·《흥보전》과 더불어 기악 연주와 무용 공연 등을 선보였다.
1950년 5월과 6월에는 광주, 대구, 부산에서 송임(松林, ?~?)작, 박동실 작곡의 《탄야곡(嘆夜曲)》을 주요 작품으로 선보였으며 이외에도 《복수삼척검(復讐三尺劍)》,《신춘향전(新春香傳)》등의 창극 작품을 공연했다.
국극협회를 개칭해 재결성한 국극협단의 1948년 5월의 첫 창립 공연은 국악원이 주최했다. 또한 1948년 6월의 공연은 ‘국악원 직속 국극협단’이란 문구로 광고한 것으로 볼 때 국극협단은 단체명과 구성원은 변경되었지만 국극협회와 동일하게 국악원의 직속 창극단으로 활동했던 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국극협단의 공연 광고를 실은 기사에는 단체의 구성원 중 박동실의 이름이 제일 먼저 거론되어 있다. 나아가 박동실은 단체의 주요 작품을 작곡했으며 창극 《탄야곡》에서는 실력 있는 명창이 전담하는 도창을 맡기도 했다. 따라서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국극협단은 국극협회를 개칭하고 재결성하면서 박동실을 중심으로 구성된 창극단이었다고 하겠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부산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던 국극협단은 전쟁 중에 사실상 단체를 이끌어 왔던 박동실이 월북하면서 단체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광복 이후 처음 결성된 국악원 산하의 창극단 국극사는 전통창극 위주의 공연을 통해 일제강점기말 훼손되었던 창극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반면 국악원 산하의 또 다른 창극단으로 창단한 국극협회와 후신단체였던 국극협단은 비록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국극사와 달리 주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며 광복 이후 창작창극의 가능성을 타진하는데 일조했던 창극단이었다고 하겠다.
김민수, 「1940년대 판소리와 창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3. 김민수, 「해방기 국악계의 활동양상:국악원과 구왕궁아악부를 중심으로」, 이화음악논집 23/2, 2019. 「국극협회창립」, 중앙신문, 1945. 12. 11. 「국극협단창립대공연 국극 민족오페라 고구려의 혼」, 민중일보, 1948. 5. 23. 「광고 단국창극단국극협단합동신춘공연」, 대구시보, 1949. 1. 8. 「창극계의 왕자 국극협단」, 동광신문, 1950. 5. 17. 「연예안내 6월 12일부터 창극계의 거성 국극협단대공연」, 남선경제신문, 1950. 6. 14.
김민수(金珉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