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역귀(병귀신)를 쫓는 행사인 구나(驅儺)의식과 그에 병연된 각종 의식 및 광대 잡희의 총칭
나례는 본래 연말 역귀(병귀신)를 쫓는 행사인 구나(驅儺)의식에서 유래하여 구나의식의 앞뒤로 새롭게 생겨난 다양한 궁중 의식을 두루 지칭하는 것이되었으며, 이후 그 의미가 더욱 확대되어 광대 잡희가 병연된 여타 의식 혹은 그 의식에 편성된 잡희도 나례로 칭하게 되었다.
나례는 중국 주나라의 나(儺)문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이후, 삼국시대부터 그 흔적은 보이지만 예식화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나례는 본래 중국의 ‘나(儺)’문화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중국의 나문화도 초기에는 ‘예(禮)’의 격식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나(儺)’로만 기록되다가, 당나라 이후 점차 예의 격식을 갖추면서 ‘나례’로 칭하게 되었다. 이후 이를 받아들인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말부터 나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문헌에 전하는 나 관련 용어를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시대 | 출전 | 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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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 『주례(周禮)』, 卷31 | 나(儺) |
한나라 | 『후한서(後漢書)』 卷10, 15 | 대나(大儺), 대나축역(大儺逐疫) |
제나라 | 『수서(隋書)』 卷8 | 나(儺), 대나(大儺) |
당나라 | 『신당서(新唐書)』 예악지(禮樂志), 卷6 | 대나지례(大儺之禮) |
『문헌통고(文獻通考)』 卷88 | 대나지례(大儺之禮) | |
송나라 | 『송사(宋史)』 卷3 | 대나(大儺) |
『몽양록(夢梁錄)』 卷6 | 대구나의(大驅儺儀) | |
『흠정속통지(欽定續通志)』 卷117 | 시나(時儺), 나례(儺禮), 대나의(大儺儀), 구의(驅儺) |
반면, 우리나라 궁정의 나문화는 고려시대에 당나라의 나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시대 초기에는 나(儺)ㆍ세나(歲儺)ㆍ납나(臘儺)ㆍ구나(驅儺) 등으로 불리다가, 이색이 지은 시 「절구(絶句)」에 최초로 나례의 명칭이 등장하고,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 정종(靖宗) 6년 12월에는 공식적으로 ‘나례’와 관련된 기록이 등장한다. 먼저 한반도의 나문화 유형을 소개하면 다음 〈도표 1〉과 같다.
나례의 핵심의식인 구나의식은 『고려사』 및 『세종실록』에 의식의 준비과정 및 의식절차가 전하고, 조선 성종 무렵에는 관나(觀儺), 관화(觀火), 구나(驅儺), 관처용(觀處容)의 4종 의식으로 정립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폐지론의 대상이 되었던 궁정 나례는 조선 후기 숙종 18년(1692) 때까지 지속되었으나 영조 30년(1754)에는 확실히 정파되었다.
나례의 예가 확립되면서 궁정에서의 나례뿐 아니라 도상(途上) 즉, 야외에서 광대의 잡희가 병연될 경우에도 나례라고 하였다. 이 도상나례는 설나(設儺)로도 불렸는데, 어가 환궁의식 및 사신 영접의식의 산대의 설치에 병연된 광대잡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도상에서의 나례는 이후 의식명 외에 여기에 병연된 광대희를 칭하는 것으로도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례를 보다’라는 뜻의 관나례라는 술어적 표현은 점차 ‘관나’라는 일반명사로 정착되었다. 나례에서 펼쳐지던 여러 종목 중 처용희는 〈처용무〉로 양식화되고 의식으로 확대되면서 ‘관처용’으로 독립되었다. 관나와 관처용은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 예연(예법에 맞춘 잔치)의 하나로 여기 및 악공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 성종 때 『악학궤범』에는 이 2종의 나례만 수록되어 있으나,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개인 문집을 대조해보면 실제로는 구나를 비롯해, 불꽃놀이를 동반한 광대화희가 펼쳐지던 관화(觀火)도 병연되고 있었다.
궁정나례의 전승과정을 도식화하면 다음 〈도표 2〉와 같다.
고려 전반 | 나(儺)(세나, 납나, 제석나, 구나, 대나 등) | |||
고려 예종 11년(1116) | 쟁기부 | 구나부 | ||
고려 충렬왕 | ↓ | 설화산대(연등회) | ↓ | |
고려 공민왕 | ↓ | 설화산(〃) | ↓ | |
고려 이색의 시 | 나례(절구) | 폭화(산대잡극) | 구나부(구나행) | 나희부(구나행) |
고려사 군례(단종1년) | ↓ | ↓ | 계동대나의 | ↓ |
조선 태조 즉위,2년 | (도상나례) | 설화희 | ↓ | ↓ |
조선 정종 1년 | ↓ | 장화희 | ↓ | ↓ |
조선 태종 1년 | ↓ | 장화희(계동) | ↓ | ↓ |
조선 태종 7년 | ↓ | 설화산대(계동) | ↓ | ↓ |
조선 태종 8년 | ↓ | ↓ | 구나 | ↓ |
조선 태종 10년 | ↓ | 장화희 | ↓ | ↓ |
조선 태종 12년 | ↓ | 진화희 | ↓ | ↓ |
조선 세종 즉위년 | 관나례 | 관화산대 | ↓ | ↓ |
조선 세종 오례 군례 | ↓ | ↓ | 대나지사 | ↓ |
조선 세종 7년 | 진나희 | 방포 | 구역 | 진처용무 |
조선 세종 9년 | 관나희 | ↓ | ↓ | ↓ |
조선 단종 2년 | 관나희 | 관화산붕 | ↓ | ↓ |
조선 세조 10년 | 관나 | 관화,관방포화 | ↓ | ↓ |
조선 세조 12년 | 관나희 | ↓ | ↓ | ↓ |
조선 성종 3년 | 관나 | ↓ | ↓ | ↓ |
조선 성종 8년 | ↓ | 관화 | ↓ | ↓ |
조선 성종 9년 | ↓ | 화산대 | ↓ | ↓ |
조선 성종 10년 | 관나 | ↓ | 축역 | ↓ |
조선 성종 21년 | 관나 | 관화 | 축역 | ↓ |
조선 성종 『용재총화』 | ↓ | 화산지희 | 구나지사 | 처용지희 |
조선 성종 『악학궤범』 | 관나 | ↓ | ↓ | 관처용 |
조선 연산 5년 | 관나 | 관화 | ↓ | ↓ |
조선 연산 10년 | 관나례 | 관방포 | ↓ | 관처용무 |
조선 연산 11년 | 나례 | 축역+배우지희 | 관화 | 회무 |
조선 연산 12년 | ↓ | ↓ | 구나(축역) | ↓ |
조선 중종 원년 | 관나 | ↓ | 축역 | ↓ |
조선 중종 4년 | 관나 | 견화산대 | ↓ | ↓ |
조선 중종 6년 | 나희(정조) | 화산대(정조) | ↓ | ↓ |
조선 중종 8년 | 관나 | ↓ | ↓ | ↓ |
조선 중종 10년 | ↓ | ↓ | ↓ | 양재처용(정조) |
조선 중종 19년 | ↓ | ↓ | ↓ | 관처용, 양재처용 |
조선 중종 22년 | 관나 | ↓ | ↓ | 관처용 |
조선 중종 32년 | 관나 | ↓ | ↓ | ↓ |
조선 중종 38년 | ↓ | ↓ | ↓ | 처용지희, 관처용 |
조선 중종 39년 | 관나정지 | 관화정지 | ↓ | |
조선 숙종 20년 | 계동대나의 정지 |
도상에서의 나례는 설나(設儺)라고도 하는데, 채붕(채색한 무대)을 설치하고 각종 잡희와 가무를 펼쳤던 것을 말한다. 김종한(金宗漢)이 쓴 『조선사략(朝鮮史畧)』(1923)에 의하면 이와 같은 전통은 신라의 고사라고 하며, 왕실의 주도하에 정식 틀을 갖추고 실시된 것은 조선 초부터로 볼 수 있다.
주로 영접의식 및 어가환궁시에 펼쳐졌다. 궁정나례와 달리 도상에서의 각종 잡희가 펼쳐지는 것을 나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1년(1401) 이전부터이다. 이는 본래부터 도상에서 산대잡희를 나례로 칭하지 않다가 궁정나례와 연행인이 겹치고 광대의 잡희가 병연되던 관행에 의해 용어가 확대 전이된 현상으로 보인다.
어가 환궁시에 으레 설치하는 나례는 세종 때 어가의 이동 동선에 따라 양식화되었다. 세종은 어가와 함께 군기감으로 하여금 나례잡희를 갖추게 하였고, 공연장소 및 공연계층의 분리 및 정립과 함께 의금부의 군기감이 종묘의 동구에서 나례(儺禮)를 올리고, 성균관의 학생들이 종루의 서가에서 가요를 올리고, 교방에서는 혜정교 동쪽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이어 정재(呈才)하게 하였다. 이후 성종 때에는 삼가요의 형식이 명확히 정립되었는데, 성종 1년(1470) 거가환궁시에는 어가를 고취와 예산붕 및 잡희로 수행하고, 성균관 생원과 여기 및 기로가 각각 가요를 바쳤으며, 어가가 궁궐문 앞에 도달하면 좌우 채붕과 함께 여기와 우인이 백희가무를 올렸다. 이후 연산군 때에는 개성부 유생(儒生)들도 어가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현수(絃首)와 공인(工人)은 각기 향속(鄕俗)대로 주악(奏樂)하게 하였다. 광해군 7년(1615)의 기록에 의하면 길가를 장식하고[가로결채(街路結綵)] 유생ㆍ기로ㆍ교방이 각각의 위치에서 가요를 올리는 것[儒生耆老敎坊歌謠]이 그 모습임을 알 수 이다. 단, 조선시대 내내 어가 환궁시 광대들의 나례는 본래 중국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는 건의가 지속되었으나, 태조 때부터 이미 영인의 음악과 창기의 가무는 우리나라의 독자적 공연문화라는 근거에 의해 지속되었다. 고려시대 이후 환궁의식의 확립 과정에 따른 나례의 변천과정을 정리하면 다음 〈도표 3〉과 같다.
<고취, 나례잡희> | <헌가요> | <헌가요> | <헌가요> | <결채붕, 정가무백희> | |
고려 의종 24년(1170) | 헌가요 | 채붕, 백희 | |||
↓ | (국자학관, 학생) | (관현방, 대악서) | |||
고려 원종 5년(1264) | 헌표, 헌가요 | 주악,쟁정백희 | |||
↓ | (내외학소속 관리, 생도) | (양부, 팔방상(창녀,악공)) | |||
공민왕 2년(1353) | 헌가요 | 기악 | |||
↓ | (성균관 12생도) | (교방) | |||
태종 1년(1401) | 헌가요 | 진전(進箋) | 산붕∙결채∙나례백희, 헌가요 | ||
↓ | (성균관 생도) | (백관) | (유후사의 신하, 교방창기) | ||
세종 6년(1424) | 나례잡희 | 헌가요 | 헌가요, 정재 | 산대 | |
↓ | (의정부,군기감) | (성균관) | (교방) | ↓ | |
『세종실록』 오례의 | 나례잡희 | 헌가요 | 정재, 정재 | 채붕 | |
↓ | (의정부,군기감) | (성균관) | (교방) | ↓ | |
문종2년(1048) | 미상 | 미상 | 교방가요 | 산대나례 | |
↓ | ↓ | ↓ | (교방, 정지) | (정지) | |
단종2년(1454) | 고취, 예산붕, 잡희 | 헌가요 | 침향산붕·헌가요 | 헌가요 | 좌우채붕, 백희, |
↓ | ↓ | (성균관 생원 등) | (여기) | (기로) | (여기, 우인) |
성종 1년(1470) | 산대나희 | 가요 | 가요 | 가요 | 산대나희 |
↓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성종 6년(1485) | 학희(학무), 예산대 | 가요 | 가요 | 가요 | 채붕, 잡희 |
↓ | ↓ | ↓ | ↓ | (여기 정재) | (대산대나례) |
성종 24년(1493) 『악학궤범』 | 미상 | 미상 | 미상 | 교방가요 | 미상 |
↓ | ↓ | ↓ | ↓ | ↓ | ↓ |
연산 3년(1497) | 고취, 잡희 | 가요 | 가요 | 가요 | 고취, 잡희 |
↓ | ↓ | (기로) | (유생) | (여기) | ↓ |
명종 2년(1547) | 정지 | 가요 | 가요 | 가요 | 정지 |
명종 22년(1567) | 미상 | 가요 | 가요 | 가요 | 기예 |
↓ | ↓ | (기로) | (유생) | (여기) | (多般呈技) |
선조 2년(1569) | 미상 | 가요 | 가요 | 미상 | 결채시행 |
↓ | ↓ | (기로) | (유생) | ↓ | (채붕나례 정지) |
광해군 1년(1609) | 정지 | 가요 | 가요 | 정지 | 정지 |
↓ | ↓ | (기로) | (유생) | ↓ | ↓ |
광해군 7년(1615) | 미상 | 미상 | 미상 | 교방가요 | 미상 |
인조 12년(1634)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효종 2년(1651)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현종 2년(1661)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숙종 2년(1676)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경종 2년(1722)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정지 |
영접의식에서의 나례는 본래 양쪽으로 채붕을 맺고 각종 잡희를 펼치는 것이었다. 이는 어가 환궁시의 나례처럼 오랜 전통이었지만, 세종 이후 좀 더 음악적인 공연형태가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세종 32년(1450)에 사신을 맞이할 때 도상에서 악을 연주하는 것이 관행이었다는 기록 및 인조때 『나례청등록』에 악공은 장악원이 담당하였다는 기록 등에 의해 영접의식에서 좌우변은 산대를 맺고 백희를 베푸는 것과 함께 음악을 쓰는 것 또한 중요한 구성이었다. 정조 즉위년(1776)과 10년(1786) 영접도감이 아뢴바에도 본래 가무동(歌舞童)과 나례잡희(儺禮雜戲), 예악(禮樂), 군악(軍樂) 등이 기록되어 있다.영접의식에서 가무백희 중 백희는 나례 혹은 나례잡희와 동명이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순조 1년(1801) 『빈례총람』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접의식에는 나례가 편성되어 있고, 고종 1년(1864)에 언급된 기록은 있으나 실제로 편성여부는 불투명하다. 따라서 백희가무는 조선 후기 정조 때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인조대 중국 명청 전환기 이후 모화관 영접의식의 좌우변 나례의 편성 형태를 정리하면 다음 〈도표 4〉와 같다.
모화관 나례 | ||||
↙ | ↘ | |||
좌변 | 우변 | |||
↓ | ↓ | |||
인조 3년(1625) 3월 28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3년(1625) 3월 28일 | 산대(山臺) | 헌가(軒架) | ||
인조 4년(1626) 3월 3일 | 잡의(雜儀) | 헌가(軒架) | ||
인조 12년(1634) 3월 27일 | 잡희(雜戲) | 헌가(軒架) | ||
인조 12년(1634) 3월 28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12년(1634) 3월 28일 | 잡물(雜物) | 헌가(軒架) | ||
인조 15년(1637) 6월 22일 | 잡희(雜戱) | 용악(用樂) | ||
인조 15년(1637) 6월 22일 | 잡희(雜戲) | 헌가(軒架) | ||
인조 15년(1637) 6월 24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15년(1637) 7월 16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15년(1637) 7월 29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15년(1637) 12월 20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17년(1639) 6월 21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17년(1639) 6월 22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17년(1639) 6월 22일 | 잡물(雜物) | 헌가(軒架) | ||
인조 17년(1639) 10월 18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17년(1639) 11월 18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21년(1643) 3월 18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21년(1643) 9월 10일 | ↓ | 헌가악(軒架樂) | ||
인조 21년(1643) 9월 23일 | 정재(呈才) | 헌가(軒架) | ||
인조 25년(1647) 2월 22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25년(1647) 2월 28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25년(1647) 2월 28일 | 잡상희(雜像戲) | 헌가(軒架) | ||
인조 25년(1647) 2월 29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25년(1647) 9월 24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25년(1647) 10월 3일 | 잡상(雜像) | 헌가(軒架) | ||
인조 26년(1648) 3월 4일 | 정재잡희(呈才雜戱) | ↓ | ||
↓ | ↓ | |||
영조 1년(1725) 3월 21일 | 나례(儺禮) | 헌가악(軒架樂) | ||
영조 1년(1725) 11월 4일 | 나례(儺禮) | 헌가(軒架) | ||
영조 5년(1729) 5월 14일 | 나례(儺禮) | 헌가(軒架) | ||
영조 31년(1755) 8월 7일 | ↓ | 헌가(軒架) | ||
영조 33년(1757) 9월 9일 | 잡희(雜戲) | 헌가(軒架) | ||
정조 8년(1784) 10월 8일 | 나례(儺禮) | 헌가(軒架) | ||
정조 8년(1784) 11월 17일 | 좌채붕(左彩棚) | 우채붕(右彩棚) | ||
정조 24년(1800) 1월 17일 | 나례(儺禮) | 헌가(軒架) | ||
정조 24년(1800) 1월 19일 | 나례(儺禮) | 헌가(軒架) | ||
순조 즉위년(1800) 11월 14일 | 나례(儺禮) | 헌가(軒架) | ||
순조 1년(1801) 6월 14일 | 나례(儺禮) | 헌가(軒架) | ||
고종 1년(1864) 8월 25일 | 나례(儺禮) | 헌가(軒架) |
○ 구성요소 및 원리
궁정나례는 구나의식에서 출발하여 조선시대 궁정 나례는 관나(觀儺), 관화(觀火), 구나(驅儺), 관처용(觀處容)의 4종 의식으로 다양화되었다.
먼저 관나에는 광대희(나희)뿐 아니라 의식의 시작 전부터 군신이 어울려 친목을 다졌던 절차도 포함된다. 이 때에는 제왕의 기호에 따라 격구희(擊毬戱), 격봉(擊棒), 척윤목희(擲輪木戱), 작시(作詩) 내기 등 다양한 종목이 행해졌다. 이날 만큼은 군신 모두 오락과 내기 등을 통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었다.
『악학궤범』과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의하면 관나에는 궁중내 여기에 의한 〈연화대〉 정재를 비롯해, 때에 맞춰 입궐한 광대들의 광대희와 민간 여성음악인인 현수(絃首, 絃手)에 의한 음악이 있었다.
관화는 고려시대의 화산대와 광대 화희 전통이 이어진 것이다. 본래 연말뿐 아니라 주로 연등회 등에서 펼쳐지던 화산대희는 조선시대 세말 전통으로 정착되었다. 이와 같이 관화가 세말 전통화되는 과정에는 태종의 역할이 컸다. 태종은 당시 폭화(爆火)에 쓸 폭약을 군기시로 하여금 개발하게 하였는데, 이때 펼쳐진 불꽃놀이는 신년하례사들을 벌벌 떨게 하였다고 전한다. 세종은 여기에 방포까지 추가하였으며, 세조때에는 관화의 명칭으로 제도화되었다. 관화는 이처럼 다양한 불꽃놀이가 연출되었기 때문에, 후원(後苑)뿐 아니라 경회루(慶會樓)와 멀리 동원산(東遠山) 등에서 다각도로 관람될 수 있었다.
구나는 중국의 나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나례의식 중 가장 연원이 오래된 것으로, 가상의 역귀를 큰소리를 내어 성문밖으로 몰아내고 제를 지내주는 정화의식이다. 구나의식은 왕명을 받아 승지가 명하면 나자(儺者), 즉 집사, 방상시, 창수, 진자, 공인, 지거(指炬)/지군(指軍), 12지신, 판관, 조왕신, 소매(小梅) 등이 각각 역할을 나누어 맡아 가상의 역귀를 4대문 밖으로 쫓아내는 연극형식의 의식이다. 중국 당나라때의 구나 의식이 6대문에 맞게 편대를 이루어 축역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4대문에 맞게 재구성되었으며, 세종 때에는 4편대가 더욱 체계화되고 단순히 타악기로 큰소리를 내는 것 외에 관악기가 추가되면서 음악성도 더해졌다. 『세종실록』 오례의에 기록된 구나의식의 준비과정과 축역절차를 도식화하면 다음 〈그림 1〉과 같다.
관처용은 12월 그믐 하루 전날 창경궁이나 창덕궁에서 〈학연화대처용무합설〉, 혹은 〈처용무〉만을 보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던 의식을 말한다. 관처용에는 왕, 대비, 동궁, 부마 등이 참여하였으며, 『악학궤범』에 의하면 규모에 따라 ‘창경궁관처용’과 ‘창덕궁관처용’의 두가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구나의식의 뒤에 이어졌고, 5경초부터 새벽 무렵 마무리되었다. 이처럼 관처용은 나례의 시작에 해당하는 관나와 대비되어 거편의 나례의식의 마무리라는 성격을 띄고 있었다. 궁중 나례의식을 묘사한 <나례가>가 연산군 때 악보인 『시용향악보』에 전하고, 수록된 여타 곡들도 궁정나례와 관계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도상에서의 나례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의식이나 어가의 환궁시에 설치되었다. 도상에서 어가를 맞이할 때 나례는 주로 각종 가무백희를 올리는 것으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동시 가무백희가 행해지는 것, 어가가 광화문에 도달하면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가무백희를 올리는 것의 두 가지이다. 이동시 수반되는 가무백희는 어가와 함께 이동하며 고취악과 함께 잡희, 특히 학희가 그 주된 내용이며, 광화문 앞에 설치된 가무백희는 양쪽의 대산대와 함께 각종 잡희를 펼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 〈도표 5〉와 같다.
근정전←←←←←←←←←←←←←←←←←←←←←←←←←←종묘의 동구 | |||||
전부고취, 예산붕, 잡희(광대) + (앞) 어가(御駕) (뒤) + 후부고취 | |||||
광화문(光化門) | 도관(都官) 앞 | 혜정교(惠政橋) | 종루(鐘樓) | ||
좌우채붕, 백희, (여기, 우인) |
헌가요 (기로) |
침향산붕, 헌가요 (여기) |
헌가요 (성균관 생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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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의식과 관련하여 중종 31년(1536)의 기록에 의하면 도상나례는 양변으로 나뉘어 각각 산대를 설치하고 정재인과 재인에 의한 정재와 잡희가 있었다. 따라서 영접의식의 나례는 두 개의 산대와 함께 각종 잡희를 베푸는 것, 혹은 당시에 펼쳐진 각종 잡희를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도상에서의 영접의식 나례는 정기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국가 중대사에 속했기 때문에 미리 산대도감이나 나례청, 나례도감과 같은 기구를 설치하고 준비토록 하였다. 나례의 준비과정은 인조 4년(1626) 『나례등록』 등에 전한다.
본래 영접의식에 좌변 산대의 백희와 우변 헌가의 가무가 편성되던 원칙은 중국 본토에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약식으로 대체되다가 폐지되었다. 우변의 헌가는 인조 27년(1649) 부터는 사신에게 미리 양해를 받아 설치하지 않게 된 이후로 줄곧 정폐되었고, 영조 1년에도 헌가의 준비를 타진해 보았으나 역시 사신의 양해로 잡상(산대)만 설치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이 그림 〈봉사도〉로 남아 있다. 정조 때는 나례도감이 으레 장악원으로 하여금 나례의식에 참여하도록 연락하였으나, 장악원은 이미 100여년 동안 삼군의 군악으로 대체되었다고 답변하며 참가하지 않았고, 이후로 헌가악은 완전히 정폐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인조 무렵 모화관 영접의식 나례에 편성된 가무백희의 내용을 좌우변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다음 <표 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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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의식의 나례(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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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변 나례(백희) | 우변 나례(가무) | |
준비 기관 | 군기시(좌변 나례청) | 의금부(우변 나례청) |
산대의 명칭 | 잡상, 산대, 잡의, 잡물, 잡희, 정재, 잡상희, 나례, 산붕, (좌)채붕 | 헌가, 용악, 헌가악, (우)채붕 |
무대 형태 | 잡상을 세운 산모양의 의물 | 헌가악을 올린 무대 |
잡상담지군, 재인(才人) | 장악원 전악(典樂), 악공(樂工), 악생(樂生), 장악원 악사와 악공, 가무동 | |
연행양상 | 잡상의 설치 및 잡희(붕희(棚戱)) 연출(사자, 호랑이, 낙타, 소간, 어물, 생선 등 +장간기, 땅재주, 탈춤, 줄타기 등) | 헌가악의 연주 및 가무 공연 |
(악공의 헌가악 연주+가무동(歌舞童)의 성악과 정재) | ||
조성 인력 | 수군 1,300명 | 수군 1,400명 |
조성 비용 | 헌가보다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어가는 설치물 | 잡상보다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무대 준비 |
연행 목적 | 희열[悅] | 위로[慰] |
궁정 나례는 궁(宮) 안에서부터 궁(宮)의 외곽, 혹은 성문(城門) 밖 등에서 다각도(多角度)로 관람 가능한 입체적인 의식이자 공연문화였다. 또한 우리나라 나례의 확립은 국가 의식에 볼거리를 추가했다는 점 외에 우리나라의 나문화가 중국의 그것과 달라지게 되는 전환점을 제시하였으며, 우리나라 고유한 민간 예술이 상층 문화와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장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도상 나례는 영접의식에 우리나라 고유한 민간 공연 문화인 나희가 확대되면서 형성된 것이다. 특히 영접의식의 나례는 본래 중국이 요구한 외교절차를 적은 『번국영조의』에는 없는 것이어서 지속적인 폐지론이 제기되었으나 당대에도 이는 우리 조선국의 고유한 것이라는 인식의 확산과 함께 지속력을 가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례는 우리나라의 고유성을 가진 공연 종목이자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의식이며, 조선시대 계층간 문화교류를 가능하게 했던 거의 유일한 계기이자 융합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사』 「악지」 『목은집』 『악학궤범』 『용재총화』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사진실, 『한국 연극사 연구』, 태학사, 1997. 윤아영, 『왕실의 연말문화, 나례』, 국학자료원, 2022. 이혜구 역,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윤아영, 「나례(儺禮) 준비 기관의 변천과 양변(兩邊)의 전통」, 『국악원논문집』 26, 국립국악원, 2012. 윤아영, 「영조의(迎詔儀)시 도상 나례(途上 儺禮) 첨입과정 및 성격에 관한 연구」, 『한국음악연구』 50, 한국국악학회, 2011. 윤아영, 「조선 환궁의식(還宮儀式)과 중국 환궁의식(還宮儀式)의 변별에 관한 연구」, 『한국음악연구』 54, 한국국악학회, 2013.
윤아영(尹娥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