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명종 8년(1178)에 술승(術僧) 치순(致純)은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 설치를 주장하였고, 명종대 별기은은 규모가 커지고 국가 제도 속에 편입되게 된다. 고려 고종 4년(1217) 거란병의 내침 시에는 기은도감(祈恩都監)을 설치하여 국가적 환난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별기은은 지방에서도 제행되었는데, 충렬왕 1년(1275) 왕을 대신하여 기은의례를 지낼 외산기은별감(外山祈恩別監)이 각 도에 파견되었다.

불교와 도교를 기반으로 행해졌던 별기은은 고려말부터 무속적 기반이 강화되었다. 고려 공양왕 3년(1391) 문신 김자수(金子粹, ?~1413)가 무속 기반의 별기은을 비판하였다. 김자수는 당시 무당이 중심이 되어 행해지는 국행 별기은을 행하는 곳이 10여 곳에 이르렀고, 별기은을 위한 경비가 상당하다고 하였으며, 여러 무당들이 태평스럽게 노상에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춤추고 노래하며 풍속을 헤친다고 하였다.

고려 말 무속 별기은은 조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태종대 국행기은에서는 환시(宦寺)ㆍ무녀(巫女)ㆍ사약(司鑰) 대신 내시별감(內侍別監)으로 하여금 향을 받들어 제사지내게 하는 등 조선 초부터 무속 별기은을 유교식 의례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여러 차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속 별기은은 유교식 의례와 병존하여 계속 유지되었다.
조선시대 별기은은 국가의 공식적인 의례인 국행과 왕실의 사적인 의례로 내전(內殿)에서 행하는 내행의 형태로 지속되었다. 별기은을 행할 때는 여악(女樂)을 베풀게 하였다는 기록도 실록에 남아있다. 국행기은은 중종대 유신들의 비판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고, 내행기은은 명종대 지방 유생들이 대대적으로 별기은처를 소각하여 인해 위축되었으나 한말까지 존속되었다. 고종 때 명성황후에 의해 행해진 별기도(別祈禱)나 산기도(山祈禱) 발기에서도 무속 내행기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민간에서 규모가 큰 기은을 행하기도 하여, 그 폐단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강혜진(姜惠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