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갈이(高思葛伊), 골소갈(骨蘇葛), 곳갈, 소골(蘇骨), 유자례(遺子禮), 관(冠), 략(畧), 건(巾). 책(幘), 두면(痘面)
승려나 농악대들이 머리에 쓰는 위 끝이 뾰쪽한 모자
고깔이란 변(弁)의 우리말 풀이로 그 어원적 해설은 첨각(尖角)이나 돌출부를 의미하는 ‘곳’과 쓰개를 의미하는 ‘갈’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뾰쪽한 관모라는 뜻이다. 고깔은 보통 흰색의 저포나 화선자로 제작하며, 농악대 , 승려 , 무당의 모자나 가면극 내 인물의 모자로 착용되기도 한다.
고깔은 우리나라의 풍속에서 하늘, 땅, 사람을 가리키는 삼신모자로 사용되어 온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고대부터 우리나라 관모의 고유 형태인 변(弁)형 관모가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면서 다양하게 변화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북사(北史)」에서는 ‘고구려 사람은 모두 머리에 절풍을 쓰고 있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고 사인(士人)은 거기에다 두 개의 새 깃을 더 꽂았다’라는 내용과 ‘귀한 자는 그 관을 소골(蘇骨)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조선복식고』의 내용에 따르면 소골(蘇骨)은 ‘솟곳’이 음치된 것으로 볼 수 있고, ‘솟’은 위로 솟는다는 뜻이며, ‘곳’은 갓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에 따라 ‘소골’이란 위로 솟은 갓을 의미한다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 열흘 동안 선남선녀들을 모아 점찰법회(占察法会)를 열어 옷을 재단하는 마름질 법을 연구했으며, 이 법회를 이끄는 선도성모(仙桃聖母)는 기도를 통해 하늘의 신들과 교감하면서 터득한 직조기법으로 붉은 비단을 직조하여 그의 남편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 변진고(弁辰考)에서 변한의 변자는 뾰족한‘弁’, 즉‘고깔’을 좋아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라 언급하며, 이 고깔 모양의 관모를 쓰는 풍습은 이후 가야에까지 이어졌다고 하였다. 이 후 시대의 고깔에 대해서는 고려 말기의 흑건대관(黑巾大冠)과도 같은 모양이라는 언급만 있을 뿐 자료가 부족하다. 다만 조선시대 고깔은 감로탱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 쓰임 및 용도 고깔은 고대부터 우리나라 관모의 고유 형태인 변(弁)형 관모가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면서 다양하게 변화된 것이다. 고깔은 농악대, 무당, 가면극 배우의 관모로 착용되었으며, 우리나라 고유의 관모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형태와 크기, 장식 및 재료가 변화되었다. 현재는 연희복식의 모자로도 착용되고 있으며, 불교에서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착복무(着服舞)인 나비춤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깔의 형태가 착용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구조 및 형태 고깔은 끝이 뾰족한 형태의 관모를 뜻하는 것으로 고깔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에는 백제의 유적지인 부여에서 출토된 지붕기와가 있다. 이는 화와변관(畵瓦弁冠)이라고도 부르며, 머리 부분에 삼각형의 관을 쓴 인물상을 볼 수 있다. 또한 가야의 유물인 김해 출토 기마인물형 토기나 경남 고령에서 발견된 금동관에서 이러한 고깔 형태를 찾아볼 수 있는데, 금동관의 경우 정면에 광배형 판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으나, 그 형태에 있어 고깔과 같이 끝이 뾰족한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제작방법 고깔은 보통 흰색의 저마포(苧麻布)나 화선지로 만드는데, 이등변 삼각형으로 배접해서 둘로 꺾어 접어서 다시 이등변 삼각형이 되게 한 뒤 밑변만 남기고, 다른 변을 붙여 뒷부분을 약간 접어 올려 만든다. 농악대가 쓰는 고깔은 세모로 접어서 모자모양을 만든 후에 종이꽃을 붙인다. 농악대 고깔에 종이꽃을 언제부터 만들어 달게 되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는 없으나 1910년대 농악대의 자료에서 종이꽃을 단 고깔을 찾아 볼 수 있어서 오래 전부터 고깔에 종이꽃 장식을 부착하여 사용했을 것이라 보여진다.
배리듬(裵리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