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례복
상중(喪中)에 있는 상주(喪主)와 복인(服人)이 입는 예복
사람 일생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중 가장 엄숙하고 정중하며 절차가 까다롭고 세밀한 것이 상례로, 상복을 일정기간 동안 착용하여 슬픔과 애통함을 표현하였다. 상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성복(成服)한다고 하는데, 초종(初終)·습(襲)·소렴(小殮)·대렴(大殮)이 끝난 다음날 성복한다. 성복은 상복을 입어야 할 유복자(有服者)들이 각기 해당되는 상복을 입는 것으로서, 죽은 사람에 대한 유복자들의 친소원근(親疎遠近)과 존비(尊卑)의 신분에 따라서 참최(斬衰)·자최(齊衰)·대공(大功)·소공(小功)·시마(緦麻) 등 다섯 가지의 상복, 즉 오복(五服)을 입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복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 이후부터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전통적 상장의례(喪葬儀禮)에 유교식 상장의례가 전해 내려와 혼합된 양상이 나타났으며, 이는 상복에도 영향을 주었다. 『수서(隋書)』 「고구려조(高句麗條)」에는 “부모와 지아비의 상에는 상복 3년, 형제는 3개월을 입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백제조(百濟條)」에는 “부모와 남편의 상에는 상복 3년을 입으나 나머지 친족은 장례를 마치면 바로 복을 벗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상복 착용 기간이 비슷하였음을 볼 수 있다. 『북사(北史)』 「동이전(東夷傳) 신라조(新羅條)」에 따르면 신라는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 대에 상복법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는데, 임금이나 부모, 처자의 상에 모두 상복 1년을 착용하여 고구려나 백제의 3년 복제와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는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대에 이르러 죽은 사람과의 친소에 따라 상복의 경중(輕重)을 가려 그 기간을 달리하였다. 신라는 불교 도입으로 인해 시체를 땅에 매장하는 토장에서 불교식 화장으로 변화하였고, 이는 상복 착용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려 초에는 불교의 융성으로 인해 이전 시대와 유사한 상복제(喪服制)를 유지하였다. 성종(成宗, 재위 981~997)은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였고, 상복과 상기(喪期)를 죽은 사람과 친족 관계에 따라 정한 오복제도(五服制度)를 반포하여 상복제도를 성문화(成文化)하였다. 또한, 이를 권장하기 위해 관리들에게 죽은 사람과의 친족 관계에 따라서 일정한 휴가를 주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이후의 왕들도 지속적으로 휴가 제도를 시행하였다. 1391년(공양왕 3)에는 『대명률(大明律)』의 제도를 본떠 복제(服制)를 정비하였으나 고려시대에는 유교식 상장의 제정 반포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에만 한정되어 시행되었다. 일반적인 복제는 백일상을 행하였고, 민간의 상장에는 전래적 요소가 강한 무불식(巫佛式) 상장이 조선 초기까지 널리 시행되었다. 민간에게 상제 의례가 보급된 것은 고려 말 주희(朱熹)의 『가례(家禮)』가 전래된 이후이다. 조선 초기 정부에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통한 유교식 상장의례를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일반 민가에서는 잘 시행되지 않았다. 이후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대에 편찬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오복제도를 규정하였고,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대 이후 상제에 대한 예법이 사대부에게 철저히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조선 중기의 상제는 예론화되어 정착되었으며, 상복제도는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서민들에게도 삼년상이 점차 일반적인 장례가 되었다. 상례 절차와 복식제도가 다양하게 분화되었는데, 지금도 ‘가가례(家家禮)’라고 불릴 정도로 지방별, 집안별로 상장제례(喪葬祭禮)가 서로 다른 것은 조선 중기의 예론에 기인한 것이다. 개항 이후 서구 기독교식 의례의 도입 및 확산과 더불어 가족과 마을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던 전통적 상장의례에서 나아가 연합장과 사회장의 출현이 이루어졌으며, 묘지·화장장·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이 변화함에 따라 상례복식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상례복식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1934년 「의례준칙」, 1936년 「의례궤범」, 1969년 「가정의례준칙」과 같이 국가의 개입에 따른 상복의 간소화에 있다. 1973년에 들어 새로 제정된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제12조 1항에 의하면 “상복을 따로 마련하지 아니하고, 한복일 경우에는 흰색 또는 검은색 복장으로 하되 왼쪽 흉부에 상장이나 흰 꽃을 달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복장을 평상복으로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였다. 근래의 상복에 남은 전통적인 요소는 굴건·행전·완장 등 몇 가지뿐이며, 대부분 양복으로 대체되고 있다.
사람 일생의 통과의례 중 가장 엄숙하고 정중하며 절차가 까다롭고 세밀한 것이 상례로, 상례가 엄숙하고 정중한 것은 한 사람이 가족, 친촉, 친지들과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므로 슬프고 정중해지는 것이고, 상복을 일정기간 동안 착용하여 슬픔과 애통함을 표현하였다.
상복을 입는 것을 ‘성복’한다고 하는데, 초종·습·소렴·대렴이 끝난 다음날 성복한다. 성복은 상복을 입어야 할 유복자(有服者)들이 각기 해당되는 상복을 입는 것으로서, 죽은 사람에 대한 유복자들의 친소원근과 존비의 신분에 따라서 참최·자최·대공·소공·시마 등 다섯 가지의 상복, 즉 오복을 입는 것이다.
오복 중에서 대공 이상은 친(親), 소공과 시마는 소(疎)가 되는데, 친소에 따라서 상복을 입는 기간은 참최·재최 3년, 재최장기(齋衰杖朞)·재최부장기(齋衰不杖朞) 1년, 대공 9개월, 재최오월(齋衰五月)·소공 5개월, 재최삼월(齋衰三月)·시마 3개월 등으로 각기 다르다. 단 재최오월·재최삼월은 상복의 착용 기간이 짧지만, 복을 기준으로 볼 때는 대공 이상이므로 중복(重服)이다. ‘참최’는 제일 중한 복(服)으로 부(父)·부(夫)·적장자(嫡長子)· 시부(媤父) 등을 위해서 가장 성글고 굵은 생포(生布), ‘재최’는 모(母)·조모(祖母) 등을 위해서 그 다음으로 중한 복으로 굵은 생포, ‘대공’은 종형제(從兄弟)·종자매(從姉妹) 등을 위해서 발이 굵은 숙포(熟布), ‘소공’은 종조부(從祖父), 종고조(從高祖)의 형제·자매를 위함으로 좀 가는 숙포, ‘시마’는 종증조(從曾祖)·삼종형제(三從兄弟) 등을 위해서 매우 가는 숙포로 만들었다. 질(絰)의 경우 참최는 저마(苴麻, 씨 있는 삼), 재최 이하 소공 이상은 시마(枲麻, 씨 없는 삼), 시마는 숙마(熟麻, 누인 삼)를 쓰고, 대(帶)는 참최는 저마, 재최 이하는 포(布, 베)를 사용하였다. 남자 상복은 관(冠)·의(衣)·상(裳)·중의(中衣)·행전(行纏)·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상장(喪杖)·리(履)로 구성되었다.
여자 상복은 소(素)족두리 또는 개두(蓋頭)·대수장군(大袖長裙)· 전계(箭笄, 비녀)·수질·요질·교대·상장·리로 구성되었다. 여자 상복은 거친 마포로 만든 치마저고리에 대수장군을 입었다.
대수장군은 소매가 넓고 길은 앞에 여섯, 뒤에 여섯 개를 달고 등바대는 겉에 대었다. 허리에는 베띠와 삼띠를 띠고 종부나 기혼자는 대수장군에 흰족두리를 쓰고 짚신을 신었다. 동자(童子)는 어른과 같은 상복을 입으나 관·수질·상장·리가 없다. 상인(喪人)의 출입복은 방립(方笠)·포선(布扇)·직령포(直領布)·교대 등이다.
죽은사람과 헤어지는 슬픔은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것으로 상례와 그 예복인 상복 역시 신분의 구분이 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국왕이 입는 왕실 상복의 형태와 구성 또한 일반의 상복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삼년상을 기본으로 하는 유교식 상례를 왕실에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국왕이 3년간 상을 치르면서 생길 수 있는 권력과 국정의 공백 때문이었다. 이를 염려하여 왕실에서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를 채택하여 상복을 입는 기간을 줄였다. ‘역월제(易月制)’ 또는 ‘단상제(短喪制)’라고도 하는 이일역월제는 한(漢) 문제(文帝)의 유조(遺詔)에 따라 비롯된 것으로, 27개월의 기간이 필요한 유교식 삼년상을 달[月]을 날[日]로 바꾸어 27일 만에 끝낼 수 있게 상기를 줄인 것이다. 이를 통해 국왕의 승하와 다음 국왕의 즉위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공백 기간을 최소화하여 안정적인 왕위 계승과 국정 안정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서 왕권 교체기에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단상제는 고려 제4대 임금인 광종 때부터 시작되어 조선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심상(心喪)이라 하여 최복(衰服)을 입지 않고 상제(喪制)로서 근신하는 마음으로 삼년상을 치르게 하였다. 『예기(禮記)』「단궁상(檀弓上)」에 의하면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며, 임금과 스승의 상도 부모의 상에 준하여 삼년상을 치른다고 하였다. 심상 3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록 최복을 입지는 않으나 상주가 지녀야 할 책임과 마음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서구 문물의 영항으로 급격한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상례는 매우 간소화되었다. 1956년 재건 국민운동본부에서 「표준의례」를 제정하였는데 상례는 성복제(成服祭), 명정(銘旌), 우제(虞祭), 졸곡(卒哭), 상식(上食), 삭망(朔望), 소상(小祥), 담제(禫祭)를 폐지하고 3일장을 기준으로 삼았다. 1969년 보건사회부에서 「가정의례준칙」,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과 「시행령」을 공포하여 법률화하였다. 상례에서 성복제, 굴건제복 착용, 만장, 음식접대 및 조화를 폐지하고 3일장과 100일 탈상을 기준으로 하여 대폭 간소화하였다. 현재 우리 나라 상장례는 크게 유교식, 불교식, 기독교식, 절충식의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정의례준칙」은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시대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절차로 간소화한 것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 상·장례는 더욱 간소화되어 입관을 마치면 남녀 상주들은 성복을 하여 상복으로 갈아 입은 다음 성복제를 올린다. 남자의 경우 상복은 두루마기, 행전, 건이며, 여자의 경우 흰 치마 저고리를 입는다. 한편에서는 서양복의 영향으로 남자의 경우 검정색 양복과 검정색 넥타이에 베로 만든 건(巾) 또는 완장·행전을 하며 때로는 완장 하나로 상제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상복은 중국의 예서인 『의례(儀禮)』, 『예기(禮記)』의 복술(服術)에 근거하여 그 원리가 조직되었다. 또한 『가례(家禮)』에 기록된 상복에 대한 개념은 유교의 종법사회(宗法社會) 중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한 계세사상(繼世思想)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오복제도를 매체로 하여 대가족제도의 형성 및 그 정착에 큰 역할을 하였다. 상복을 입을 수 있는 오복친(五服親)은 유복친(有服親)이라고 하여 가족이라는 혈연공동체의 공고한 일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오복친을 통해 장자상속(長子相續)이라는 재산 상속제도와 제사라는 조상숭배 행위는 그 구체적인 친족의 범위를 확실하게 정할 수 있게 하였으며, 오복의 등급에 따라 가족 간의 친소의 구별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가족사회 차원에서의 상복의 기능은 점차 발전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조상숭배와 천도(天道)를 숭배한다는 이념 아래 봉건적· 정치적 수단으로 쉽게 이용되었다. 결국 차별등급적인 오복제도는 그대로 확대되어 국가의 제도적 차원으로 발전하였으며, 유교 국가의 체제 유지 수단이 되었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상복은 생자(生者)의 심리적 안정성에 기여하는 표현적 도구 역할을 한다. 임종(臨終)에서 길제(吉祭)에 이르는 상례의 전체 과정에서 사절변화(四節變化)의 우주조화(宇宙調和)에 따라 상복이 거상 기간의 단계별로 애도지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오복제도에 맞춰 상복의 소재·디자인·바느질 방법·시접 방향 등에 차이가 있다. 또한 신분제도가 철저한 조선시대에는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해 오복제도에 맞춰 착용하였다.
『가례』 『사례편람』 『삼국사기』 『수서』 조우현, 「조선시대 상복에 관한 연구」 ,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박성실 외 5인, 『한국의 수의문화』 , 신유, 2002.
안명숙(安明淑)